[한국고대사] 초기백제도읍지의 문제(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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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본론
(1) 초기도읍지에 관한 문헌기록들
(2) 몽촌토성
(3) 풍납토성

3. 결론 - 유적의 보호와 복원과 관련하여
본문내용
1. 서론

한국고대사는 그동안 많은 논쟁거리를 남기며 새로운 역사복원을 위한 가능성들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이 문헌서적 견해차에 의한 논쟁 중심이었다. 백제 초기 도읍지에 관한 논의는 고대사의 이런 한계점들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며 고고학을 통한 문헌사의 객관성 확보라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아직도 백제초기도읍지 혹은 백제왕성에 관한 견해는 아직까지도 그 차이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의견이 분분할뿐더러 그만큼 초기백제사 연구가 활발하지 못함도 그 원인이 될 수 있겠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초기도읍지에 대한 연구와 발굴이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1983년부터 몽촌토성 발굴 『몽촌토성』, 서울대학교 박물관, 1988, 1989.
, 1986년부터 6차에 걸쳐 이뤄진 이성산성발굴 『이성산성』, 한양대학교 박물관
, 1996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풍납토성발굴 『서울 풍납토성(백제왕성) 실츨조사연구』, 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97.
등이 이뤄지면서 백제초기역사 복원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였다. 백제 초기 도읍지의 위치비정은 한 유적의 발견 차원을 떠나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신빙성문제, 사적지의 종합적인 보존복원책(특히 풍납토성에 관하여) 조선일보 1997년 9월 29일 “풍납토성파괴의 전주”
1999년 4월 14일 “문화유적이 사라진다(풍납토성”
연합통신 1999년 9월 12일 “삼국사기 초기기록 논쟁끝낸 풍납토성”
경향신문 2000년 4월 25일 “풍납토성은 백제초기 밝힐 열쇠”
등이 맞물려 쉽게 결론 지을 수 없는 문제이다.
금번 발표문에서는 백제 초기 도읍지에 관한 여러 가능성 중에서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을 분석하고 수도로서의 가능성을 제시해 보려 한다. 아울러 문화의 복원과 계승이라는 현재의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가 사익에 파묻혀 영원히 사라지는 현재 시점에서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에 대해서까지 생각해 봤으면 한다.

2. 본론

(1) 초기도읍지에 관한 문헌기록들

초기백제(한성시기) 도성 및 그와 관계되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을 살펴보자

1) 마침내 한산에 이으러 부악에 올라 살 만한 곳을 내려다 보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살고 싶어했다. 이에 10신들이 “하남의 땅은 북으로는 한수를 두르고 동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기름진 땅을 바라보며 서로는 대해로 막혀 있습니다. 이처럼 천연의 지리적 이 점은 얻기 어려운 지세로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라고 아뢰었다.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신의 보좌를 받으며 나라 이름을 십제라 하니 그 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이

참고문헌
․『몽촌토성』, 서울대학교 박물관, 1988, 1989.
․『이성산성』, 한양대학교 박물관
․『서울 풍납토성(백제왕성) 실츨조사연구』, 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97.
․『풍납토성(백제왕성) 연구논문집』, 동양고고학연구소, 2000.
․ 박현숙 『백제이야기』, 대한교과서, 1999, p.40.
․ 최몽룡, 심정보 편저,『백제사의 이해』, 학연문화사, 1991.
․ 신형식, 『한국의 고대사』, 삼영사, 1999
․ 노중국, 『백제 정치사 연구』, 일조각, 1988.
․ 이기동, 『백제사 연구』, 일조각, 1996.
․ 김태식,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김영사, 2001.
․ 성주탁, 「한강유역 백제초기 성지연구」『백제연구』14, 1983.
․ 조대연, 「서울 풍납토성 발굴조사 성과」『제43회 전국역사학대회』요지문, 2000.
․ 백제연구소 편, 『백제사의 비교연구』, 서경문화사, 2000.
․ 『역사스페셜』2, 효형출판,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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