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지 레포트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10.03.09 / 2019.12.24
  • 12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1,4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목차

1. 머리말
2. 황룡사의 역사
3. 가람규모와 배치의 변화
4. 황룡사 발굴과정

5 황룡사 구층목탑
6. 황룡사 장륙존상
7. 황룡사 출토유물
8. 맺음말

붙임1.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황룡사 관련 기사
붙임2.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나타나는 황룡사 관련 기사
붙임3. 황룡사 관련 고려시가

본문내용
3. 가람규모와 배치의 변화
황룡사지는 발굴조사 결과 가람 규모와 배치의 변화가 세 번 있었음이 밝혀졌다. 창건 당시의 1차 가람은 중문과 남회랑, 동·회랑을 놓아 백제의 일탑일금당 형식이었다. 그러나 곧 5미터에 가까운 장육존상을 모시기에는 금당이 너무 작았던 것이다. 2차 가람은 645년 구층목탑을 건립하면서 완공된 것으로서, 내부를 구획하던 회랑이 없어지고 중문을 창건하여 가람의 남쪽에 새로 설치하였다. 또한 그 북쪽에 목탑·중금당·강당을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하고 중금당의 동·서쪽에 동·서금당을 남향으로 배치한 일탑삼금당의 배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들이 말하는 황룡사는 바로 이 2차 가람을 가리킨다.
2차 가람 완성 이후 여러 차례 걸쳐 수리와 중건이 계속되면서 황룡사의 가람 배치도 변화가 일어난다. 그 후 통일 신라시대에 들어와 황룡사의 가람 배치는 다시 한번 변화가 생기게 된다. 황룡사의 남쪽에서부터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중심선상에 자리잡고, 중금당 좌·우에 각각 회랑을 갖춘 동·서 금당이 위치한 일탑삼금당의 독특한 가람 배치가 이루어진다. 또한 목탑 좌우에는 정방형의 종루(鐘樓)와 경루(經樓)가 세워진다. 현재 각 건물들의 초석이 잘 남아 있어서 남쪽으로부터 중문, 탑, 금당, 강당자리를 볼 수 있고, 회랑 자리도 초석 흔적들이 남아 있다.
황룡사 3차 가람의 구조에서는 종을 달았던 종루지가 있다. 황룡사의 동종은 754년에 49만여 근의 구리를 들여 만들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현재 경주박물관에 있는 성덕대왕신종의 무게가 12만여 근이므로, 황룡사종의 크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황룡사는 산속에 위치하고 있는 다른 절과는 달리 평지에 위치함으로써 아늑한 느낌을 받을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황룡사는 이를 보완하기 위하여 가람 배치를 남문 3칸, 중문 5칸, 목탑 7칸, 금당 9칸, 강당 11칸으로 점차 칸수를 늘려 절 안으로 들어갈수록 부처님의 넓은 세계로 들어서는 느낌이 들도록 배려하였다.

4. 황룡사 발굴과정
황룡사지는 지난 1976년부터 1983년까지 8년에 걸쳐 대규모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이마오천여 평에 이르는 절터는 동서 288미터, 남북 281미터에 달한다. 현재까지 조사된 바로는 불국사의 8배 크기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절이었다. 현재는 구층목탑 터의 주춧돌, 장육삼존이 있던 대좌를 비롯해 넓은 터를 채우고 있던 각종 건물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황룡사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백제지역의 익산 미륵사지 발굴조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고고학적 발굴사상 최대규모, 최장기간 진행되었다. 그리고 황룡사 일대에 원래 연못이었음이 발굴조사 결과 밝혀졌으며, 이 연못을 메워서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황룡사 구층목탑은 1976년부터 10년간 세밀한 조사가 이루어 졌다. 그러나 목탑지는 발굴 이전부터 금당지(金堂址)와 같이 기단 상면에 초석이 드러나 있어 규모와 초석의 배치형식을 알 수 있었다. 정면과 측면은 모두 7칸의 평면형식이었고, 건물내부는 외진주(外陣柱
: 겉에 내보이지 않게 된 기둥)초석 배치와 같은 주열상(柱列上)에 모두 초석이 배치되어 있어, 심초석(心礎石)을 중심으로 4천주(四天主)초석․제1내진초석․제2내진초석․외진주초석의 순으로 초석들이 놓여 있었다. 현재 외두리기둥 초석은 모두 28개이고, 안두리기둥 초석은 모두 36개로, 기단상에는 총 64개의 초석과 하나의 심초석이 놓여 있다. 평면 4각형의 탑 자리에는 기둥이 놓였던 주춧돌만 남아있다.

5. 황룡사 구층목탑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백제문화를 찾아서
  • 가능성도 크며, 본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왜곡과 포장의 개연성이 오히려 높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문화를 마음으로 느끼고 생각하게 하는 노력보다 보고 즐기는 면에 집중되는 이같은 문화재 복원사업들이 과연 얼마나 오랜 생명력을 가질지도 의문이다.-이 자료는 정보유통 활성화를 위해 레포트 천국에서 가져온 자료입니다.정보아이디어지식 복합 포탈의 리더 다자바컴(www.dajaba.com)

  • [답사보고서] 부석사에 다녀와서
  • 사지의 목탑지와 대동군 상오리사지의 목탑지가 고구려시대로 전해지고 있으며 백제시대의 예로는 부여 군수리사지를 비롯한 금강사지, 미륵사지, 중원탑지 등에 목탑의 방형기단이 남아 있다. 그러나 가장 대표적인 목탑으로는 지금 흔적만 남아 있는 신라의 황룡사 9층 목탑과 사천왕사 쌍탑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고려시대의 만복사지 목탑지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법주사 팔상전(1624년)이나 쌍봉사의 대웅전과 같은 목조건축 등이 현존하는

  • [임산공학] 목재 공학적 측면에서 본 황룡사 9층탑(30)
  • 황룡사지는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절터인데. 황룡사는 진흥왕 14년(553) 창건된 뒤, 진흥왕 35년(574)에 신라3보의 하나인 장육존상(丈六尊像)이 완성되었고, 진평왕 6년(584) 금당이 완성되었다. 금당에는 유명한 솔거의 벽화가 있었다고 한다. 선덕여왕 14년(645)에는 자장의 건의로 황룡사 9층목탑이 세워짐으로써 1탑3금당식의 독특한 가람배치를 이루었다. 신라 최대의 호국사찰로서 고려시대에도 왕실의 보호를 받았던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 몽고족

  • 경주 황룡사지(皇龍寺址)와 분황사지(芬皇寺址)
  • 경주 황룡사지(皇龍寺址)와분황사지(芬皇寺址) 분 류절터소 재 지황룡사지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20-1분황사지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13 ● 답사포인트1. 황룡사와 분황사의 창건배경을 정치적 이유와 관련해서 살펴보자.2. 황룡사와 분황사의 가람배치와 규모의 변화과정을 알아보자.목차  I. 들어가며  Ⅱ. 황룡사    1. 황룡사의 소개와 가람배치    2. 황룡사의 창건 배경    3. 황룡사의 역사     4. 주요 문화재 Ⅲ. 분황

  • [한국문화학] 황룡사지(답사자료)
  • 황룡사지(皇龍寺址)◈ 소 재 지 :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사적 제6호 ◈ 발굴연도 : 1976∼1983 경주 월성의 동쪽, 용궁의 남쪽에 있는 이 절터는 칠처가람지허의 하나로 황룡사는 규모나 사격이 신라에서 가장 크고 높은 절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절터는 과거불인 가섭불의 연회좌석이 있는 곳으로 가섭불 시대부터 있었던 가람터라 하였는데 이는 신라 땅이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