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한양의 생활공간 -청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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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는 말

2. 본론

3. 맺음말

본문내용
태종 6년(1406)년의 기록이다. 이 기록을 보면 한성부에 6백명인데, ‘개천을 파는 일을 맡았다‘ 라는 부분이 있다. 이 개천을 파는 일이 바로 청계천을 파는 작업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궁궐을 만드는 일과 함께 하는 것을 보면 그만큼 국가의 큰 사업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장의동(藏義洞) 어귀로부터 종묘동(宗廟洞) 어구까지 문소전(文昭殿)과 창덕궁(昌德宮)의 문앞을 모두 돌로 쌓고, 종묘동 어귀로부터 수구문(水口門)까지는 나무로 방축(防築) 축대. 토사(土砂)가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쌓아올린 벽.
을 만들고, 대·소광통(大小廣通)과 혜정(惠政) 및 정선방(貞善坊) 동구(洞口) 어귀
, 신화방(神化坊) 동구(洞口) 등의 다리[橋]를 만드는 데는 모두 돌을 썼다 ....중략.... 개천 도감(開川都監)에서 아뢰기를, “역사에 나와서 병들어 죽은 자가 64인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일에 시달려서 죽은 자는 심히 불쌍하다. 마땅히 그 집의 요역(徭役)을 면제하고, 또 콩과 쌀을 주라.” 하였다. 임금이, “하천을 파는 것이 끝났으니, 내 마음이 곧 편안하다.” 하고, 또 말하였다. 『태종실록』권23, 12년 2월 15일


태종 12년(1411)의 기록인데, 이 기록을 보면 일에 시달려서 죽은 자에게 그 집의 요역을 면제하고 콩과 쌀을 준다는 말이 있다. 이를 통해 조선 초기 민심을 달래기 위해 지배층이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세종 때의 기록인데, 한양이 조선의 도읍으로서 자리를 잡자, 인구가 늘어나게 됨에 따라 청계천의 활용 여부가 대두되었다. 청계천의 활용 여부에 대해, 명분론과 현실론이 맞섰다.

이때 집현전 수찬(修撰) 이선로(李善老)가 청하기를, “궁성(宮城) 서쪽에 저수지(貯水池)를 파서 영제교(永濟橋)로 물을 끌어넣을 것이며, 또 개천(開川) 물에는 더럽고 냄새나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도록 금지하여, 물이 늘 깨끗하도록 해야 하겠나이다.”...중략... 『세종실록』권106, 26년 11월 19일


세종 26년(1444)의 기록이다. 이 기록을 보면, 이선로는 풍수학에 의거해서 청계천을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고 말한다. 청계천은 서울에서 유일하게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하천이기 때문에, 풍수지리학적인 관점에서는 언제나 깨끗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http://sillok.history.go.kr)
이경재, 『청계천은 살아 있다』, 2002, 가람기획
서울특별시중앙문화재연구소, 『서울 청계천 복원구간내 청계천 유적』,2004
서울시 청계천 공식 홈페이지(http://cheonggye.seoul.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com)
홍성태, 「청계천의 공간문화: 파괴, 정체, 그리고 희망」,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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