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 광개토왕릉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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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서론
Ⅱ.본론
1.100년동안의 논쟁, 광개토왕릉비
2. 국연과 간연으로 보는 수묘제
3. 고구려의 대민편제와 비문에 나오는 民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서론
고구려사 연구에 있어서 광개토왕릉비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다양한 영역과 관점에서 광개토왕릉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적지 않다. 왜냐하면 상당수의 연구가 辛卯年號 기사 등 몇몇 주제에 집중되어 왔기 때문이다. 사실 신묘년조 기사는 그동안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아 왔으나, 아직도 여전히 정확한 판독의 문제가 남아 있으며, 같은 판독문에서도 그 해석이 다양하다. 근자에는 原石拓本을 통한 연구가 활발하나 아직도 정확한 판독에는 의문이 많이 남아 있다. 따라서 연구의 시각을 바꾸어 비문 자체의 문장구조나 단어의 용례를 분석함으로써 당대 고구려인의 관념을 해명하는데 초점을 맞추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예컨대 그동안 신묘년조 논쟁의 중심은 ‘臣民’의 주체와 대상이 누구냐 하는 것이었다.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당대 고구려인이 사용한 臣民의 개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고, 나아가 그에 앞서 비문 내의 ‘民’의 용례를 충분히 검토할 필요가 있겠다.

Ⅱ.본론
1. 고대로부터의 통신<100년동안의 논쟁, 광개토왕릉비>
2. 국연과 간연으로 보는 수묘제
3. 고구려의 대민편제와 비문에 나오는 民

1.100년동안의 논쟁, 광개토왕릉비
◎. 신묘년 기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 백잔(百殘)과 신라(新羅)는 옛적부터 (고구려의) 속민(屬民)으로서 조공(朝貢)을 해왔다.
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軍討伐殘國 영락 6년(396) 병신년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였다.

일제 시기 일본 관학자들의 해석 -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잔(백제)과 □□□羅(가라,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위당 정인보 선생의 견해 -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바다를 건너가 (왜를)격파하였다. 백잔이 (왜와 연결하여)신라를 (침략하였다. 신라는 고구려의 신민臣民이었기에,❲영락6년 병신에 왕이 군대를 이끌고 백잔을 토벌하였다❳. 이 해석은 일본의 학설에 대한 한국 측 최초의 문제 제기라는 점에서 많은 영향을 끼쳤다.
북한의 박시형과 김석형의 해석 - 왜가 신묘년에 오니, (고구려가)바다를 건너가 (왜를)격파하였다. 백잔이 (왜와 연결하여) 신라를(침략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박시형)
왜가 신묘년에 건너왔다. (고구려가) 바다(패수)를 건너 백잔 □□신라를 격파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김석형) 이 중 김석형의 견해는 정인보의 해석을 넘어 문맥의 뜻이 순조로와 많은 지지를 얻었지만 신묘년 기사만이 아니라 앞뒤 문장 전체를 고려해보면, 신묘년 문장은 앞뒤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고립된 문장이 된다.
한국의 학자 정두희, 이기백도 또 다른 해석법을 제시 하였다. - (고구려가)왜를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가 격파하였다. 그런데 백제가 (왜를 불러들여)신라를 침공하여 신민으로 삼았다. 이 해석은 앞뒤 문장의 논리적 연결이란 점에서 문맥이 잘 통하지만,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고 그 목적어가 문장 서두에 도치되었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이른바 고구려 주어설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견해들은 당시 상황에서 볼 때 결코 왜가 백제나 신라를 신민으로 삼을 수 없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앞의 두 견해는 모두 위의 판독문이 옳다는 것을 전제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진희의 비문 변조설이 제기된 이후에는 위의 판독문 자체를 부정하여 해석을 유보하거나 새로운 판독에 입각한 해석도 시도되고 있다.
이진희는 ‘래도해파來渡海破’의 넉 자가 일본의 참모본부에 의해 조작된 글자이므로 기존 해석은 모두 타당치 않으며, 글자의 판독이 원상으로 복구되기 전에는 이를 해석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신묘년 글자 중에서도 기왕에 ‘해海’ 자로 판독되던 글자는 변죄된 것임이 틀림없다. 오늘날에는 이 글자의 판독을 유보하는 입장이 적지 않다. 하지만 글자를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문장 전체 해석을 마냥 내려버둘 수는 없는 실정이다. 몇몇 대표적인 견해를 살펴보자.
왜가 신묘년 이래로 바다를 건너 (백제로)왔다. 고로 백제가 신라를 침략하여 (신라를) 신민으로 심으려고 하였다.(천관우)
그 후 (백잔과 신라가) 신묘년으로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잔⋅왜구⋅신라를 격파하여 신민으로 삼았다.(이형구) 이형구(李亨求)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들어, ‘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그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왔는데, 그 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으로 되어, 이 주장이 공인을 받으면, 일본 사학계의 ‘고대남조선경영론’이 근거를 잃게 된다.

참고문헌
한국역사 연구회 고대사 분과, 『고대로부터의 통신』, 2004
임기환,「광개토왕비의 국연과 간연-4,5세기 고구려의 대민편제의 일례-」『역사와 현실』 13, 한국역사연구회, 1994.
「광개토왕릉비문에 보이는 ‘民’의 성격」, 고구려발해학회, 1996
조법종,「廣開土大王碑文에 나타난 守墓制硏究-守墓人의 編制와 性格을 중심으로」,『한국 고대사연구』8, 한국고대사학회, 1995.
이도학,「광개토왕릉비문의 國烟과 看烟의 性格에 대한 再檢討-被征服民 施策과 관련하여」 ,『한국고대사연구』28, 한국고대사학회, 2002.
김락기,「高句麗 守墓人의 구분과 立役方式-廣開土王陵碑 守墓人烟戶條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연구』41, 한국고대사학회 , 2006.
선석열,「고구려 지방통치 연구의 진전,」 부경역사연구소, 2006
권오엽,「한일건국신화의 세계관-광개토왕비문신화의 천하사상」, 동아시아일본학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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