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노지고로] 가노지고로의_생애와_유도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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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노지고로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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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노지고로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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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타공용과 정력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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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가노지고로의 생애와 유도사상

가노지고로의 생애
이번 레포트를 하면서 처음 시작한일은 가노지고로의 생애에 대해서 알기위해 가노지고로의 생애를 말하고 있는 책을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노지고로의 생애에 대해서 서술한 책은 많지 않았고 찾기 어려웠 으며 내용도 심층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의 것을 찾기가 어려웠다.
스포츠사적 입장에서나 무도사적 입장에서 분명 중요한 업적을 이룬 사람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 씁쓸한 마음을 들게도 하였다.
찾아본 것 중에 그나마 유도론에서 유도의 역사와 창시자로서 가노지고로에 대해서 서술한 내용이 있어 정리해 보자면 가노지고로(嘉納治五郎-가납치오낭)는 1860년 10월28일 가노지고로사꾸마레시가(嘉納治郎作希芝-가납치낭작희지)의 3남으로 효고갱(兵庫縣-병고현) 무꼬군(武庫郡) 미가게초(御影町-어영정) 하마시가시(浜東-빈동)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의 이름은 신스께(伸之助-신지조)였다.
메이지 3년(1870), 11살이었을 때 고향에서 동경으로 상경하여 가기가라초에서 부친과 함RP 살게 되었다. 상경한 가노는 사까운 요고꾸의 세이다쯔즈꾸(成達書塾-성달서숙)에 다니게 되어 우부가타게이또 라는 사람에게 학문을 배움과 동시에 간다(神田)의 미쯔구리 슈헤이(萁作秋坪)라는 학당(쥬꾸)에서도 공부를 했다.
가노는 여기서 유교(儒敎)와 서도(書道)를 배웠다. 메이지 6년(1873), 14살때에는 이꾸에이(育英)학당에 들어가 처음으로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학당은 네덜란드 사람이 선생이었고, 독일 사람이 조교였으며, 모든 학과는 영어로서 진행되었다. 가노는 이전에 미즈꾸리 슈헤리의 학당에 다닐때 어느 정도의 영어를 배웠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지만 당시 그들 사이에 강한 사람이 인정받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에 신체가 작았던 가노로서는 여러모로 불리하였다.
또한 병은 없었지만 매우 허약해 보이는 체구인탓에 항상 그들 사이에서는 약해보였다. 학문에서는 타인에게 지지않는다는 자신감은 있었지만 몸이 허약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소외당한 것에 대해 항상 불만을 지니고 있어 자신을 강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하는 고민을 하였다. 가노가 어렸을 때 일본에는 유술이라는 것이 있어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이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을 상기하여 유술을 배우고 싶어 했다.
그때 가노의 집에 자주 오던 자들중에 나까이 우메이나리(中井梅成-중정매성)라는 사람이 있어서 자신이 옛날에 유술을 배운적이 있다고 자랑하면서 여러 가지 기타(形)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그 삶에게 유술을 배우고 싶다고 부탁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이 당시에 유술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또한 고이시가와 마루야마초(小石川丸山町)에 있던 부친의 별장에서 일하던 편동유사(片桐柳司)라고 하는 사람이 가끔씩 유술의 본(形)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도 유술을 배우고 싶다고 부탁을 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그밖에 마찬가지로 자신의 집에 출입하던 비후출신으로 이마이겐시로(今井鉉四郎-금정현사낭)라고 하는 사람이 큐신류(披心流)라고 하는 유술을 배운 사람에게도 부탁하였지만, 그 역시 거절 하였다.
이와 같이 유술수련이 불가능한채로 학업에 열중하였지만, 보다 강하게 되고 싶다는 생각이 항상 머리속에 있었다. 메이지7년(1875), 4월21일 동경외국어학교의 입학시험에 합격하였기 때문에 이꾸에이즈꾸(育英義塾)에서 동경외국어학교(東京外國語學校)의 영어학부에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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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하였고, 이 학교가 얼마 안 있어 영어부가 독립하여 관립 영어학교로 되었다. 메이지8년(1875) 개성학교(開成學校)에 입학하였다.
이 개성학교에는 육체적으로 강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풍조가 이꾸에이즈꾸에 있을 때보다 더욱 강하였기 때문에 신체적으로 허약했던 가노는 더욱더 유술에 대한 욕구가 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친에게 유술가(柔術家)를 소계해 달라고 여러차례 부탁하였지만, 그 당시에는 공부가 우선이라고 하여 동의하여 주지 않았다. 그러나 가노 자신도 상당한 연령에 있었고, 신체를 강하게 하기 위하여 유술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자신에게 적당한 스승을 찾으려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명치10년(1877), 18살 EO 동경대학교(東京大學)이 창설되어 그대학의 문학부 제2기생으로 입학하였지만, 입학당시 언뜻 정복술을 하는 사람이 유술가로서 유명하다고 들었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정복이나 접골이라는 간판이 있으면 직접 들어가 유술을 한적이 있는지 없는지를 물어보며 찾아 다녔다.
그러나 유술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사람이 많았고, 그 중에서는 과거에 유술을 하였지만 당시에는 유술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이런 식으로 스승을 찾아 다니던 때에 니혼바시(日本橋-일본교)의 진교초(人形町-인형정) 거리에서 벤케이바시(弁慶橋-변경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접골간판이 보여 들어가 물어 본 결과, 야기마사스께 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머리와 수염이 하얗고, 골격이 장대한 대장부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가노가 유술을 배우고 싶다는 처지를 설명하니, 가만히 듣고 있던 야기마사스께(入木貞之助-입목정지조) 노인은 무릎을 치며 기뻐하였다.
그러나 자신은 이소마타우에이몬(磯又右衛門-기우우위문)의 제자로서 그 면허를 받을 정도로 옛날에는 전문적으로 유술을 하였지만, 지금의 분위기(이 당시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는 유술에 대해 인정을 하지 않는 추세였기 때문에 접골을 하고 있다고 하였다. 가능하다면 가노의 희망을 들어주고 싶지만, 이곳은 8장의 다다미공간으로 비좁고 게이코(稽古-계고:연습)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니혼바시(日本橋-일본교)의 모토다이꼬초(元大工町-원대공정)에 자신의 동문인 후꾸다야스께(福川入之助-복천입지조)라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다른 친구들은 거의 대부분 유술을 그만 두었지만 이 후꾸다는 도장을 가지고 있으니 한번 가보라고 소개를 해주었다. 그 후 후꾸다를 방문하니 여기서도 겨우 10장의 다다미 공간밖에 없었고, 그 중에서도 다다미 한 장 정도는 계단으로 사용되고 있어 나머지 9장이 도장(道場)으로서 사용되었으며, 다음의 3장 정도의 공간이 접골의 치료소가 되어있어 6장밖에는 도장의 공간으로 활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공간도 때로는 환자의 대기실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가노는 자신의 바라던 희망이 이루어져 크게 기뻐하며 드디어 텐진신요류의 유술을 접하게 되었다. 이때 후꾸다의 문인으로 연습을 하러 온 관원들은 가끔씩 오는 사람이 4-5명정도였고 매일 오는 사람은 1명이었으며, 격일로 오는 사람은 1명정도였다. 그중에서 매일 다니고 있던 사람은 본을 배워 관원들에게 연습을 시키고 동료들과 자유연습을 하는 형태의 연습이 매일 계속되었다. 이 때의 연습은 찰과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옴몸이 만신창이 되도록 연습하였던 시기였다.
이런 노력으로 기량은 더욱더 늘게 되어 메이지 12년(1879) 미국의 전대통령(18대)인 글랜튼장군이 왔을 때 시부자와에이찌 라는 사람에게 초대되어 이소 마사토모, 후꾸다 야스께와 그밖의 유술 명가와 함께 아스까야마에 있던 시부와자 별장에서 유술시범을 보였다. 메이지 12년(1879) 8월 14일 후꾸다 스승은 52세로 죽게 되었고 후꾸다의 제자들중에는 자유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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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가노보다 강한 제자가 있었지만, 본과 자유연습을 병행해서 수행하였고 매일 도장에 나온 제자가 가노밖에 없었다.
이러한 가노의 연습에 대한 열정을 고려해서 후꾸다 사람들로부터 신용을 받아 후꾸다가에 전해져 오는 전서(傳書)일체를 물려받게 되어 후꾸다의 도장을 위탁 받았다. 여기서 한때 그 도장을 맡아 연습을 하였지만, 아직까지 혼자서 도장을 운영할 자신이 없었고, 더욱이 더 높은 수준의 수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였다. 그래서 새롭게 입문(入門)한 것이 간다(柛佃-신전)에서 도장을 열고 있던 텐진신요류의 이소마타우에이몬(流祖磯又右衛門-류조기우우위문)의 제자로서 이소가에 입적하여 3대째의 도장을 상속받고 있던 이소마사토의 도장에 입문한다.
이소 도장에서는 후꾸다 도장의 동료 후꾸시마 겐요시와 함게 입문하게된다. 당시에 이소는 이미 60세정도의 노령으로 자신이 직접 자유연습 지도를 하지 못하였지만 본(形)의 명인으로 본(形-형)의 가르침은 자기자신이 직접하고 있었다. 자유연습은 사또(佐藤-좌등)와 우라마쯔(村松-촌송)라고 하는 사람이 간사(幹事)를 담당아고 있었지만, 가노와 후꾸시마도(福島-복도) 후꾸다 도장에서 상당한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이 두사람과 함께 보조사범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도장에 매일 출석하는 사람은 30명정도 되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휴식하는 사람이 많았다. 따라서 가노 혼자서 대부분의 사람을 상대로 매일 본을 수련하였다. 도한 자유연습도 매일 30명을 상대로 수련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고, 연습과 자유연습으로 늦께까지는 11시가 넘어서 귀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소마사토는 체력이 매우 작았고, 젊었을 때부터 자유연습은 별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에는 명인이었지만 자유연습에서는 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가노는 이소의 도장에서 자유연습은 거의 자신이 가르치면서 이소로부터 본에 대한 것은 매우 많이 배웠다고 전해진다. 이와 같이 가노가 열심히 수행하고 있을 때 이소는 메이지 14년(1881)6월 62세로 죽게 되어 또다시 스승을 잃게 되었고, 다시 새로운 스승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세 번째의 스승은 기또류의 이이꾸보고넹(飯久保恒年-반구보항년)이다.
이이꾸보는 가노의 대학친구 모토야마마사시사의 부친인 마사오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 모토야마는 법학부의 제1회 졸업생으로 메이지 12년(1879)에 졸업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노보다 선배였고, 가노가 대학에 입학한 때에는 대학에서 야구가 시작되어 가노와 고다이류사꾸(五代龍作-오대용작)는 투수, 모토야마와 시오다라는 사람은 포수를 하였다. 그래서 모토야마와 소풍에도 항상 함께하는 매우 절친한 관계였다. 모토야마의 부친은 전 막부(幕府)의 강무소(講武所)에서 기또류 유술의 선생을 역임하였고, 기또류 유술의 상당한 명인(名人)이었기 때문에 가노는 전에 배운 텐진신요류와는 다른 유파여서 가르침을 구하였다. 이사람은 본의 명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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