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자로서의 세종의 업적과 경영학부 재학생으로서 바라본 세종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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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세종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외교적, 종교적인 면 등에서 전의 다른 통치자들보다 탁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집현전을 설치하여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만들었고, 과전법과 직전법등의 조세제도를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고자 하였으며, 한글을 창제하여 민족문화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 대외적으로는 지금의 국경을 확정시키는 등 여러 방면에서 국가경영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아래에서 경영자로서의 세종의 업적과 경영학부 재학생으로서 바라본 세종시대의 모습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1.정치
조선초기의 혼란을 안착시키고, 법과 제도에 따라 국정을 운영할 수 잇도록 시대는 세종에게 바라고 있었다. 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 집현전이다. 집현전은 학문 연구 기관으로서 제도적으로는 도서의 간직과 이용, 학문 활동, 국왕의 자문에 대비하는 일등을 맡아보았다. 집현전에서는 정치에 귀감이 되고 후세에 본이 될 각종 사서의 편찬과 주해 사업 등을 활발히 하였다. 그 전까지 명목뿐이던 집현전을 대폭 정비해 젊은 학자들의 연구와 토론을 위한 상설기구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집현전 설치의 의의는 그동안의 권한이 의정부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이를 집현전으로 무마시킴으로서 왕권과 신권의 적절한 조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실제로 우리 역사상 이러한 예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중요한부분이며. 특히 왕이 자신의 권력을 양보하면서까지 이러한 정치를 펼친 예는 상당히 드물다.
또한, 다양한 제도를 통해 관리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빈부격차를 해소하려고 노력했다. 그중에 하나가 대동법이다. 조선시대 공물제도는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게 하였는데, 부담이 불공평하고 수송과 저장에 불편이 많았다. 또 방납, 생산되지 않는 공물의 배정, 공안의 증가 등 관리들의 모리 행위 등의 폐단은 농민부담을 가중시켰고 국가수입을 감소시켰다. 이러한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세종시대의 관리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각 고을의 특산물로 공납을 하던 방법 대신에 쌀로 공납을 하게 했는데 이 제도가 대동법이다. 경기도부터 시작된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시행되기 까지는 10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대동법의 시행으로 인해 화폐가 필요하게 되었고 따라서 화폐의 유통이 활발해 졌다. 이것은 후에 조선의 상공업이 발달할 수 있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활동하고 있는 관리와 예전에는 관리로써 활동을 하였는데 지금은 관리의 자리에서 물러난 사람들에게 돈을 지급해 주는 대신 나라의 토지를 지급해 주고 사망한 후에는 토지를 반납하는 과전법을 실시하였다. 사망 후에 토지를 반납하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 여러 가지 폐단을 낳기는 했지만 이것은 관리들의 경제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재정을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실시된 것일 뿐만 아니라, 세조의 집권을 시인하고 그 아래에서 관리로서 봉사하는 사람에게만 생활의 기반을 보장해주는 정치적인 의미도 가진 것이었다.
2.외교
세종 시대의 외교는 크게 평화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우선 조선의 북쪽으로는 여진족이 있고 남쪽으로는 일본이 있었다. 여진족은 조선의 북쪽에서 침략을 일삼았다. 이런 여진족에게 세종은 귀순을 장려하거나 벼슬을 주는 회유책과, 국경에 4군과 6진을 설치하는 강경책을 함께 사용했다. 4군 6진은 최윤덕이 압록강 유역에 4군(여연,자성,무창,우예)을, 김종서가 두만강 유역에 6진(종성,온성,회령,경원,경흥,부령)을 개척함으로서 현재의 압록강에서 두만강에 이르는 국경이 세워졌다. 세종은 이곳에 충남지방의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사민정책을 펼쳐 국토가 균형적으로 발전 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일본에 관해서도 회유책과 강경책을 사용하는 교린정책을 썻다. 3포[부산포(동래), 제포(김천), 염포(울산)]를 개항하여 일본인에게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교류를 허가하는 한편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여 이종무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대마도 정벌을 하는 등 의 강력한 군사적 강압책을 펼쳤다. 명나라와의 관계를 보면, 처녀진헌을 폐지하는 한편, 당나라에 보내던 금, 은의 조공물을 폐지하고 마, 포로 대신하도록 했다.
3.사회 문화
세종 시대는 우리나라 문화의 발전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을 발전을 이룩하였다. 먼저 한글창제를 들 수 있는데, 한글의 우수성은 세계에서도 인정받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당시의 조선은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한문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우리말과 중국말의 다른점이 많아 자신의 뜻을 표현하거나 사용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또한 일반백성들은 말로는 의사소통 할 수 있었으나 문자를 사용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세종은 일반 백성들이 배우기 쉽고 또 자기의 뜻을 표현 할 수 있도록 한글을 창제하기에 이르렀다. 한글은 독창적인 문자로 다른 문자를 모방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의 발음 기관과 천ㆍ지ㆍ인 삼재를 본떠 독창적으로 창제한 문자이다. 여기에는 세종의 강한 민족자주정신이 드러난다. 또한, 한글은 이원적 구성으로 만들었다. 훈민정음 28글자를 제각각 만든 것이 아니고 먼저 몇 개의 기본자를 만들고 여기에 획을 더해 가며 나머지 글자를 파생시켜 다른 글자들을 만들었다. 훈민정음 창제당시 자음은 17자인데 기본자 다섯 글자를 먼저 만들고 나머지 파생 글자를 만들었다. 모두 28글자를 만들었지만 자음 다섯 글자와 모음 세 글자를 바탕으로 나머지 글자들은 가획의 원리에 따라 획을 더 그어가며 파생된 것이므로 글자를 쉽게 익힐 수가 있다. 훈민정음 해례 서문에 슬기로운 이는 아침먹기 전에, 어리석은 이라도 열흘이면 깨우칠 수 있다고 한 것은 거짓이 아니다. 이와같은 이원적 구성에 의한 글자의 창제는 글자의 체계를 매우 체계적으로 해 줄 뿐만 아니라 문자 학습에 있어서도 기억 부담량을 줄여 주어 배우고 활용하는 데에 매우 유리한 점으로 작용한다. 여기에서 가획의 원리를 적용하는 데 있어 글자를 형성하기 위해 단순히 가획만 한 것이 아니고 거기에도 의미가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의 창제자가 기본자와 그 밖의 글자들 간의 음성학적 관계를 파악하고 있었다고 할 수있다. 예를 들어 기본자 ㄱ에 획을 더하여 ㅋ을 만들었는데 단순히 획을 더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그 획의 의미가 있어서 소리가 세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한글의 우수성은 정보화 사회에서 한글이 생존할 수 있는 매우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한다.
세종조는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유교 정치,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시대이다.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시기였다. 집현전을 통하여 많은 인재를 길렀고, 유교 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 제도를 정비하였으며, 나아가 겨레 문화를 높이는 데에 기본이 된 훈민정음의 창제, 방대한 편찬 사업, 농업과 과학 기술의 발전, 의술과 음악 및 법제의 정리, 국토의 확장 등 수많은 업적으로 나라의 기틀을 확고히 하였다. 요즘 들어 기업경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많은 기업경영자들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사회 환경과 소비자들을 고려하지 않고, 기업의 이윤만을 추구하다 보니 비리와 같은 사회 문제들이 발생한다. 또 기업내부의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 사원들의 불만도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조선시대에도 비슷하게 발생하였을 것이다. 관리들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무리한 세금을 걷고, 평민들의 의견은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종은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집현전을 설치해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 신하들의 의견을 수용해 대동법등의 제도를 시행하기도 하고, 불교를 탄압하자는 신하들과의 토론에서는 뛰어난 언변으로 신하들을 꼼짝 못하게 하며 자기의 의견을 밀고 나가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영으로 세종이 집권하던 조선은 역사상 가장 평안하면서도 많은 발전을 이룰 수 있었고, 장영실처럼 양반출신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받고 성공 할 수 있었던 거 같다. 세종의 경영은 오랜시간이 지난 옛날의 경영이지만 혼자하는 경영이 아니라 왕권과 신권을 적절히 조화시키고 신하의 의견도 적극 수렴하는 등의 함께하는 경영이 였기에 그가 아직도 대왕으로 불리며 존경받는 이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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