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공황이 경제에 미친 영향] 경제공황이 경제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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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921년의 불황은 특히 영국을 강타하여 수출을 격감시키고 실업자를 급증시켰다.(1921년 1월 100만 명이었던 실업자가 6월에는 200만 명으로 늘어났다.) 불변가치로 본 수출의 감소는 제철 생산물과 석탄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면직물공업과 모직물공업, 기계제조업 등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편 1923년의 독일의 수출은 1913년의 물량수준을 회복했다.) 실업은 20년대 전반에 걸쳐 백만 명 이상의 영국노동자를 희생시켰다. 그러나 런던시는 그 지위를 회복하였다. 미셸 보 저 / 김윤자 역, 《자본주의의 역사》, 창작과 비평, 1987, pp.223~227, 이하 각주를 달지 않은 부분은 이 책을 참고한 것임.

프랑스의 프랑화는 1928년에 가서야 비로소 공식적으로 전전(戰前)의 1/5수준에서 금태환성을 회복하였다. 독일 마르크화의 경우는 1922~1923년의 붕괴 후 대외신용, 특히 영국의 신용공여에 힘입어 재건되었고, 동일한 움직임 속에서 국가기구도 발전, 근대화 되었다. 1924~1930년의 기간 동안에 독일이 획득한 대외신용은 독일이 실질적으로 지불한 배상액의 두 배 반이 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독일은 원료를 조달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금 및 외화 보유고를 회복하고 대외투자를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엄청난 채무관계가 청산되려면 생산과 국제교역이 크게 늘어나 시급히 수지균형을 회복해주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의 통화책임자들은 금에 기초하는 통화제도로의 복귀를 선택하였으며, 이는 영국의 무역회복을 어렵게 하고 무역수지를 맞출 수 없는 모든 나라에 타격을 가하였다. 이와 동시에 어떠한 금융센터도 이 전반적인 사태를 책임지지 못했다. 미국의 은행들은 아직 그럴 능력이 없었고 런던시는 리더십 회복에 전전긍긍하고 있어서 그러러 만한 힘이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불안한 국제적 배경 속에서 각국의 자본주의는 각각에 고유한 과정을 따라 전개되고 있었다. 영국은 강요된 희생을 거부하는 투쟁적인 노동자들과 해외 공업경쟁국의 끈질긴 도전 사이에서 고전하였다. 독일의 자본주의는 집중을 강화하고 동태적으로 확장해가면서 패전의 수치를 극복하려는 국가적 의지로 버티고 있었다. 프랑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불균형 상태에 빠져, 대공업과 수공업, 지방의 정체와 제국의 모험 사이에 분열을 보였다. 미국 자본주의는 광적인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혼란과 추기에 빠져 있었다. 그 밖의 모든 나라들-유럽 다른 나라의 자본주의, 일본의 자본주의, 1차대전을 통해 최초의 기회를 잡은 ‘신생국’의 새로운 생산 등이 전개되고 있었다.
해외시장을 둘러싼 싸움도 격화되었다. 그리하여 파운드화가 금태환성을 회복하자 영국의 수출은 1924년에서 1926년 사이 감소를 경험하였고, 1927년에서 1929년까지는 1924년 수준 이하로 떨어졌다. 프랑스의 수출은 20년대 전반기에는 프랑스화의 가치절하로 혜택을 보았으나 1926년의 금융안정화 및 1928년 금본위제 복귀 등으로 1928년 이후에는 여러 부문의 수출이 축소되었다. 이와 같은 각축 속에서 구자본주의는 신흥자본주의국의 진출에 부딪혀 쇠퇴하게 된다.
1920년대 전반에 걸쳐 영국은 만성적인 불황상태에 있었다. 20년대 말에는 불황이 여타 자본주의국 곳곳에도, 특히 미국과 프랑스에 잠재하고 있었다. 월가의 증권투기와 공황은 미국 경제위기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태와 그것이 세계의 은행과 금융에 미친 반작용, 그것이 미국의 교역축소를 통해 미치게 될 효과, 이런 것들이 사실상 이미 진행 중이던 혹은 준비되고 있던 공황을 각국에 촉발시켰던 것이다.
서유럽의 약소국은 모두 국제무역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공황 기간동안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1920년대에 영국과 프랑스가 금본위제로 복귀하였을 때 서유럽과 동유럽의 비교적 작은 여러 나라는 금환본위제를 채택하였다. 이 나라들의 중앙은행은 자국 통화의 교환성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금 보유고를 유지하는 대신에 비교적 큰 나라의 중앙은행에 예금을 했는데, 이는 그러한 목적에 기여하였다. 1931년에 영국이 금본위제를 이탈한 후에 주로 영국과 교역을 하고 있던 대부분의 나라들도 금본위제에서 이탈하고 그들의 통화를 파운드 스털링에 연계시켰다. 이로써 ‘스털링 블록’이 형성되었다. 이 블록에는 대부분의 영연방 국가와 영국의 식민지, 몇몇 중동국가, 그리고 유럽의 포르투갈과 스칸디나비아 제국 등이 포함되었다. 1933년에 미국이 달러를 평가절하 했을 때 남미와 캐나다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주요 교역 상대국은 그들의 통화를 달러와 연동시키려고 애썼다. 그에 따라 유럽에서는 프랑스가 스위스․벨기에․네덜란드를 포함하여 금 태환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나라들로 구성된 ‘금 블록’의 중심이 되었다. 그들은 1936년까지 이 블록을 유지하였다. 프랑스가 마침내 프랑을 평가절하하고 금과의 연계를 단절했던 것은 통화문제에 있어서 국제협력이 제한적으로 재개됨에 따라 이루어진 조치였다. 1936년의 삼국통화협정에서 영국․프랑스․미국의 정부는 경쟁적인 평가절하를 피하기 위하여, 그리고 다른 방식을 통하여 국제경제의 회복에 기여하기 위하여 각국의 환율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것은 자그마한 발전에 불과했다. 론도캐머런 저 / 이헌대 역, 《간결한 세계 경제사》, 범문사, 1999, p.419

공황을 극복함에 있어서 이탈리아보다 더 성공적이었고 실제 서구의 민주국가들보다도 더 성공적이었던 나치 독일은 완전한 경제회복을 달성한 최초의 주요 공업국이 되었다. (비교적 작은 나라들 중에서는 스웨덴이 1930년대를 통하여 그 어떤 나라보다도 낮은 실업률을 기록하였다.) 독일 경제는 1933년에 전노동력의 1/4에 해당하는 6백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했던 상황에서 벗어나 1939년에는 노동자 수보다 일자리 수가 더 많은 상태에까지 도달하였다. 이러한 성과는 특히 재무장 계획으로 인해 수정된 대규모 공공사업 계획에 의해 이룩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독일은 최초의 근대적인 고속도로 체계(아우토반)를 구축하였으며 공업을 대폭 강화하고 확대하였다. 이를 통해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의초년도에 적국에 대한 결정적인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위의 책, p.420

정리해보자면, 조정된 팽창이 불가능했다면 대안은 독자적인 경기팽창을 위해 각국이 국제경제체제로부터 이탈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수단이 평가절하였다. 금태환을 일시중단하고 통화가치 하락을 허용함으로써 각국은 자국의 수출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금본위를 포기한 나라들은 그것을 계속 고수한 나라들보다 더 빨리 수출이 회복되었다. 이것의 효과는 다른 나라들의 경쟁적인 평가절하에 의해 중화되어 버릴 수 있었다. 더 중요한 점은 평가절하가 독자적인 팽창정책을 추구할 수 있는 추가적인 영역을 제공했다는 데 있다. 양동휴 편저, 《1930년대 세계 대공황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p.24


참고문헌
론도캐머런 저 / 이헌대 역, 《간결한 세계 경제사》, 범문사
양동휴 편저, 《1930년대 세계 대공황 연구》, 서울대학교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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