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답사]경복궁 문화유적 답사- 광화문, 해태, 근정전, 사정전, 근령전, 교태전, 아미산, 경회루, 수정전, 자경전, 향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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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말
경복궁을 답사하고 쓴 답사기입니다. 일반적으로 근정전과 경회루만을 돌아보고 쓴 것이 아니라 역사적의미와 각 궁궐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본문내용
친구들과 술을 먹으면 항상 지나가는 곳이 광화문 사거리이다. 광화문은 문이다. 네거리가 아니라 분명히 문이다. 경복궁의 정문이다. 항상 불빛에 비추어진 광화문을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경복궁을 답사하고 싶었다. 항상 마음만 가지고 있었지 지척에 있으면서도 가지 못하던 참에, 강의 과제로 문화재 답사 장소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 벼르고 벼르던 경복궁을 제대로 답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경복궁의 중창은 단순한 옛궁의 재건이 아닌 새로운 궁궐의 조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임진왜란이래 본궁을 버려 두었다는 명분과 함께 외세들로 인하여 실추된 왕권을 다시 세우려는 흥선 대원군의 꼿꼿한 의지가 서려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광복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조선 총독부 청사 뒤에서 반 백년을 지켜온 그 내면의 모습과 한 나라의 정궁임을 마음에 새기고 그 안에서 보여주는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보고 올것으로 생각된다.
경복궁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와 그 지지자들은 고려의 서울인 개경으로부터 도읍을 한양성으로 옮겨 신도 경영에 착수하는 동시에 궁궐의 조성도 착수하였다. 1394년(태조 3) 9월 신궐조성도감을 두고 청성백 심덕부, 좌복야 김주, 전정당문학 이염, 중추원학사 이직 등을 판사에 임명하여 실무를 담당, 해산을 주산으로 삼고 임좌병향의 터를 잡았다. 원래 태조는 고려시대 남경의 이궁 터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새로운 왕조의 뻗어나는 기세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은 터전이라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일단 옮긴 태조는 수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3일에 궁궐과 종묘를 짓겠다고 산천신에게 고사하고, 이튿날 개기하여 주야로 작업을 진행, 1395년 9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명칭은 《시경》의 ‘군자만년 개이경복’이란 글귀에서 따서 경복궁이라 하였다. 궁내에 준성된 전각은 총 390여 칸이었다.
경복궁 답사는 '비전'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곳에서 북쪽을 향해 서면 백악이 보이고, 그 서쪽으로 인왕산이 벌려 있고, 동쪽으로는 산자락이 흘러 내려가며 경복궁을 감싸고 있는 형국이 한 눈에 들어온다. 조금 눈을 들어 보면 그 너머로 북한산의 보현봉이 고개를 내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광화문 네거리에서 광화문으로 가는 길은 참 멀다. 광화문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서 접근할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넓다는 세종로와 또 율곡로, 사직로가 이리저리 가로막고 있다. 차도를 버리고 인도를 따라 가야 하는데 그러자면 한참을 빙 에돌아 지하도나 건널목을 건널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대개는 지하철 경복궁 역에서 내려 지하도나 인도를 따라 가지 않으면, 버스나 승용차를 타고 가 주차장으로 들어가는데 어떻게 하든 결국은 이미 안으로 들어온 뒤에 뒤쪽 옆에서 다가가는 것 아니면 옆에서 몰래 다가가 불쑥 옆구리를 찌르는 꼴이다. 우리가 누구를 만날 때 옆이나 뒤쪽에서 불쑥 튀어나온다면 그것은 장난 아니면 위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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