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통사 2`pp.384~449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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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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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Ⅰ. 『한국문학통사 2』pp.384~449 요약
8.6. 사림문학, 심성에서 우러나는 소리
8.6.1. 김종직과 그 제자들
8.6.2. 왕도정치의 이상
8.6.3. 서경덕․ 이황 이후의 방향
8.6.4. 선조 때의 상황
8.7. 방외인문학에 나타난 반감의 양상
8.7.1. 김시습
8.7.2. 도피와 반발의 자취
8.7.3. 미천한 처지에서 겪는 고통
8.7.4. 삼당시인과 임제
8.7.5. 여성 한문학의 등장
Ⅱ. <금오신화> 작품평가
Ⅲ. 생각해 볼 문제
Q 1.
김종직이 사장(詞章)과 경술(經術)을 모두 중시한 태도를 안이하다고 비판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Q 2.
세종이 수양대군을 시켜 편찬하도록 한 <석보상절>과 세종이 직접 지은 <월인천강지곡>이 훈민정음과 불교를 결합시켜 한문지배, 유학 중심의 문화가 일방적으로 굳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하나의 정치적 활동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가?
-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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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사림문학, 심성에서 우러나는 소리
8.6.1. 김종직과 그 제자들
조선 초기 사대부 세력 가운데 한쪽은 중앙 정계에서 기반을 굳혔으나 다른 한쪽은 지방 중소지주의 위치에서 진출할 기회를 찾아 서로 대립했다. 지방 중소지주가 먼저 두각을 나타낸 곳이 영남지방에서도 선산이었다. 지방 중소지주는 도학을 기본 사상으로 삼았는데 이 도학은 길재가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면서 도학에 힘써, 정몽주에게서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에게로 학통이 이어졌다고 한다. 이 기반을 딛고 김숙자의 아들 김종직이 선두에 서서 관직을 얻어 중앙 정계로 진출해 훈구파와 맞서기 시작했다.
김종직은 도학에 힘쓰지 않고 적극적인 진출을 꾀했다. 기존 세력에 꿇리지 않는 역량을 가져, 관이문학에 맞서는 사림문학의 노선을 마련하였다. 김종직은 ‘방달’이라고 일컬어지는 건강하고 역동적인 작풍을 개척했다. 그렇게 해서 표현의 수준이나 언어 구사에서 관인문학보다 뒤떨어지지 않으면서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여주려고 했다. 김종직은 스스로의 선택에 합당한 이론을 마련하여 도학과 문학 또는 경술과 문장을 하나로 아울러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훈구파는 김종직을 경쟁자로 보아 경계하였으며, 후대의 사림은 김종직이 지나치게 타협했다고 나무라는 결과만을 낳았다.
김종직은 작품 <신륵사>로 방달한 시풍의 특징을 잘 나타냈고, 자기 고장 영남의 문화적인 전통에 깊은 긍지를 가지고 신라의 고사를 <동도악부>라는 이름의 연작시로 읊었다. 또한 영남은 서울의 권신들 때문에 수난을 당하는 고장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낙동요>를 지었는데 이는 민요풍의 노래이다. 김종직은 남도 백성들의 고난에 마음으로나마 동참하였다. 하지만 김종직이 벼슬을 해서 남도 백성들을 위한 무슨 시책을 펴거나 권신의 횡포를 막을 방도를 차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김종직은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으나 거의 다 사화를 만나 희생되고 말았다. 김종직 자신은 세조의 왕위찬탈을 풍자했다고 인정된 <조의제문>을 쓴 것이 빌미가 되어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가장 높이 평가되었던 김종직의 제자는 유호인이다. 단명한 덕에 사화를 당하지 않았다. 성현은 유호인의 시가 이치를 스스로 깨달은 바 있어 편마다 법칙이 있고 구마다 뛰어나다고 평가하였다.
이주 역시 김종직의 문하생으로써 갑자사화 때 사형을 당하였다. 기걸스럽고 힘찬 시풍을 지녔다고 평가된 것은 시련 때문에 좌절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작품 <야좌>에 잘 드러나고 있다.
남효온도 김종직의 제자이며,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벼슬은 하지 않았으며 글을 잘한다고 이름을 떨치지도 못해 김종직의 제자 가운데서도 특이한 인물이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를 썼고, <애인생부>와 <득지락부>를 지어 때를 만나지 못해서 슬퍼하는 방황하는 심정을 하소연하였다. 하지만 방외인의 길을 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조위 또한 김종직의 제자이고 무오사화가 일어날 때에 귀양처에서 죽었다. 유배지에서 지은 가사 <만분가>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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