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대사] 영선사와 신사유람단(조사시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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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론

본론

1. 영선사

2. 신사유람단(조사시찰단)

결론
본문내용
서 론

18세기 후반, 개화사상이 담긴 실학파의 주장인 실사구시는 억눌려 묵살됐으나 19세기 초반에 서기동점(西器東漸)의 영향을 받은 기술서가 서유거, 최한기 등 선구적 학자들에 의해 번역되어 기술보급을 자극하였다. 그러나 저변확대가 부족하고 따라서 새 물결의 여파가 미약하여 이러한 서영의 문명에 대한 수용능력이 부족하였다.
당시 조선은 순조부터 철종에 이르는 60여 년 동안, 외척의 세도정치가 계속되고 조정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져 잦은 민란이 일어나 사회가 어지러웠다. 당시에는 조정의 학정으로 탐관오리와 부정부패 그리고 서민수탈이 만행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가뭄이 계속되어 민중들의 생활이 극도로 궁핍했다. 또한 19세기 중엽에는 서학의 유입과 서양 선교사의 포교활동과는 별도로 '이양선의 무리가 포성으로 위협하면서 청나라에 상륙하여 난리가 났다.'는 소문이 세간에 퍼져 사회가 불안에 휩싸였다.
그러던 중,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필두로 이양선을 앞세워 프랑스, 미국 그리고 일본 등 열강은 교역을 빌미로 인천 앞바다에 나타나 위협하였다. 프랑스의 위협(병인양요)과 미국의 위협(신미양요)은 대원군의 강력한 의지 아래, 조선군의 끈질긴 항쟁으로 물리쳤으나 대원군이 물러난 후 운양호를 이용한 일본의 위협에 결국 병자수호조규(강화도 조약)를 맺으며 개항의 문을 열게 되었다. 개항 후 조선은 보다 근대화를 일찍 시작하여 기술이 앞섰던 청과 일본에 자극받아 서양의 근대식 기술을 배우기 위한 정책을 세워 영선사(領選使)와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파견하였다. 영선사는 무기제조기술을 배워오기 위해 청국에 파견하였고, 신사유람단은 시찰을 목적으로 일본에 보냈다. 이 글에서는 당시 파견됐던 영선사와 신사유람단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참고문헌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 개화기 해외유학생(영선사행) 파견에 관한 교훈, 조명제, 대한기계학회,
기계저널 제41 권 제9호, 2001
· 개항기 조선정부의 대일유학정책, 김기주, 한국근현대사학회, 한국근현대사연구 제29집, 2004
· 신사유람단을 1881년 일본시찰단으로, 이이화, 역사비평사, 역사비평 2005년 겨울호(통 권 73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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