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 원의 세조 쿠빌라이의 정복전쟁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07.08.01 / 2019.12.24
  • 8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1,0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하고 싶은 말
쿠빌라이의 정복전쟁에 관해 자세하고 세밀하게 정리한 레포트 입니다.
지난학기 동양사 시간 과제물로 20점 만점에 20점 받은 자료입니다.
쿠빌라이칸 관련 레포트를 작성하시는데 많은 도움 되실겁니다.
목차
< 원의 세조 쿠빌라이의 정복전쟁 >

1. 서 론

2. 본 론
1) 원제국의 성립
(1) 쿠빌라이와 원의 건국
(2) 남송 정벌
2) 쿠빌라이의 마지막 다섯 차례 정벌
(1) 고려 침공
(2) 일본정벌
(3) 동남아 정벌
(4) 대외 정벌의 한계
3) 원대의 동서 문물 교류

3. 결 론

- 참 고 문 헌 -
본문내용
(1) 쿠빌라이와 원의 건국
쿠빌라이가 원나라를 수립하면서 몽골 제국은 유목민과 농경도시민이 공존할 수 있는 거대한 건조농업지대를 지배하는 새로운 형태의 정복왕조로 변모했다. 처음에 쿠빌라이는 몽골 제국 제4대 칸인 몽케로부터 중국 방면의 국정을 담당하는 대총독으로 임명되었다. 평소에 중국통치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이것을 기회로 몽골족만이 아니라 중국인 유자(儒者)나 봉건제후들을 자기 진영에 영입함으로써 그 세력을 다져나갔다. 그리하여 원의 세조가 된 후에는 대도(大都:베이징)에 수도를 정하고 중국식 연호를 만들어 중통(中統) 1년(1260)이라 했다. 그리고 1271년에 다시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하고 중국식 천자가 되었다. 이에 대해 몽골의 왕족들은 쿠빌라이를 승인하지 않고 그의 동생인 아릭 부케를 칸으로 추대했으며, 이로 인해 두 세력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아릭 부케는 몽골 본토의 총독이며 수도 카라코롬의 유수(留守)였다. 그는 몽골의 지배자로 쿠릴타이를 그 땅에서 소집하여, 자신의 대칸 선출을 확실케 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그를 앞질러 군대를 데리고 무창에서 북쪽으로 오면서 상도에 본부를 두었다. 1260년 6월 4일 쿠빌라이는 자신의 일파 즉 그의 군대에 의해 대칸으로 선언되었다. 이것에 의해 쿠릴타이에 의해 선출되었던 아릭부케는 쿠빌라이와 전쟁을 시작하였고, 결국 경제력이 월등한 쿠빌라이가 승리했다. 원나라를 건국한 쿠빌라이에게 있어서 가장 큰 과제는 남송을 굴복시키는 일이었는데, 치밀한 준비 끝에 1268년 남송정벌을 재개한 쿠빌라이는 1279년 긴 전쟁 끝에 넓고 비옥한 남송의 토지를 복속시켰다.

(2) 남송 정벌
대칸 자리에 오른 쿠빌라이 앞에 가로놓인 문제는 무엇보다도 먼저, 송과 체결한 조약을 이행토록 하는 일이었다. 이것을 위해 쿠빌라이는 학경(郝經)을 송에 파견하여 즉위를 알리는 동시에 조약의 이행을 독촉했다. 학경은 학문이 깊고 견식도 뛰어나 금련천 이래 쿠빌라이의 고문 학자다. 이 사절에 몽골인을 참가시키지 않은 것은 쿠빌라이가 송을 문화 국가로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런 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사실을 가사도는 황제에게 감추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학경이 사절로 옴에 따라 사태가 탄로날까 두려워 학경과 그 수행원들을 오랫동안 구금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따라서 쿠빌라이는 처음 조약대로 송을 속국으로 존속시킬 작정이었으나, 이 불손한 태도에 진노하여
참고문헌
- 정성환 / 인물로 보는 중국역사4 / 신원문화사 / 1994
- 장문평 / 여.원(麗.元)의 일본원정 / 軍史17 / 1988
- 레이 황 / 중국, 그 거대한 행보 / 경당 / 2002
- 백양 / 맨얼굴의 중국사4 / 창해 / 2005
- 이춘식 / 중국사서설 / 교보문고 / 2005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고려시대사] 몽고풍으로 살펴본 고려와 원나라의 교류에 관하여
  • 원래 특수문자이지만 알파벳으로만 표기하였다.의 발음이 같다는 점이다. 이것은 ‘수라’가 특수한 역사적 배경 또는 환경에서 차용됐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즉, 몽골, 터키족의 알타이어족과의 어휘와 비교해봤을 때, 왕을 나타내는 의미였던 단어가 고려에 들어오면서 ‘왕께 올리는 밥상’의 의미로 변했다고 볼 수 있다. 김기선, 앞의 책, pp. 198~2014. 나오며지금까지 원 간섭기에 고려에서 유행하였던 몽고풍을 중심으로 원나라와 고

  • [중국문화] 중국이민족
  • 정복지 지배는 세조(쿠빌라이)가 즉위하는 中統元年(1260)을 분기점으로 하여 그 이전의 몽골 제국 시대(1206∼1260)와 이후의 元帝國時代(1260∼1368)로 양분된다.‣통치 체제 : 원은 정복민의 통치에 하여서는 철저한 민족의 차별 정책과 함께 관료의 등용에서도 중국적 과거제도 대신 문벌 주의를 취하였다. 몽골은 정복민에 대한 대우의 기준을 그들의 대외 정복 전쟁 때 피정복민이 어떻게 협조하였는가에 따라 결정하였다. 元朝治下 정복민의 신분 구분

  • [세계사] 몽골제국과 징기스칸fp
  • 쿠빌라이와 아릭뵈케 간에 벌어지나 쿠빌라이가 승리. 훌라구는 이슬람의 압바스 왕조를 멸망시키고 서아시아를 정복하여 일한국(伊兒汗國)의 지도자가 되어 원조정권을 시종 종주국으로 받들며 우호 관계를 유지 ④ 헌종(몽케1248-59) ⑤ 세조(쿠빌라이1260-94)-元朝시작 훌레구> 일칸국 아릭뵈케 3) 정복전쟁① 칭기즈칸의 시대 - 정복전쟁을 통해 중앙아시아의 서요西遼, 이란방면의 신흥국가 호라즘, 西夏(1038-1227)를 차례로 멸망시킴 * 호라즘(

  • 칭기즈칸과 쿠빌라이
  • 쿠빌라이의 형 몽케가 4대 칸으로 등극하고, 그는 형 몽케 칸을 도와 대리, 토번을 정복하였다. 그는 몽케 칸이 죽은 다음 반대 세력을 물리치고 몽골 제국의 5대 칸으로, 원의 초대 황제인 세조가 되었다. 그는 수도를 카 라코람에서 대도(베이징)로 옮기고, 중국을 몽골 제국의 중심으로 하여 1271년 국호를 ‘원’이라 일컬었다. 1279년 남송을 멸망하고, 고려, 안남, 버어마, 자바를 굴복시키고, 일본을 정벌하는 등 북아시아 민족에 의한 최초의 동아시아

  • 잘못된 세력 융합, 원 세조 쿠빌라이(중국사 속 인물조사)
  • 통일했다는 것이다. 이 업적은 그가 야만족․유목민 출신의 정복자라는 점 때문에 더욱 가치 있는 것이다. 중국의 공식 사서(史書)에서조차도 쿠빌라이는 존대를 받고 있다. 1276년 쿠빌라이의 부장인 바얀이 남송의 어린 황제를 사로잡았다. 남송 지역의 남송 지지세력은 1279년까지 항쟁을 계속했으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는 1260년부터 연호를 쓰기 시작했고 남송이 붕괴하기 7년 전인 1271년부터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제정․선포했다.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