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황후가 된 고려 여인 기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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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원나라 황후가 된 고려여인
기황후
1. 기황후의 삶
고려 출신으로 몽골명은 올제이 후투그(完者忽都, Oljei Khutugh), 시호(諡號)는 보현숙성황후(普顯淑聖皇后)이다.
1333년(충숙왕 복위 2)에 원나라의 휘정원(徽政院)에 있던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高龍普)의 추천으로 궁녀가 되어 순제의 총애를 받게 되자 정후인 다나시리(答納失里)로부터 학대를 받았다.
1335년에 다나시리의 일족이 축출되자 황후로 책봉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바엔(伯顔) 등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1339년 황자 아이유시리다라(愛猶識理達臘)를 낳았으며, 이듬해 2월에 바엔세력이 물러나게 되자 4월에 드디어 제2황후로 책봉되었다.
황후가 된 뒤 곧 반대세력을 몰아내고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이름을 바꾸어 이를 배경으로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이와 같이, 원나라에서의 세력이 비대해짐에 따라 고려에서도 일족인 기씨(奇氏)의 세력이 기반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1365년에는 전례를 깨뜨리고 정후가 되었으나, 1368년 원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행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 고려의 공녀에서 원나라 황후가 되기까지
칭기즈칸[成吉思汗]이 몽고 부족을 통합하고 나선 정복 전쟁은 중국 대륙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를 닥치는대로 치고 들어가 끝도 없이 영토를 넓히는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파죽지세로 일어나 그 누구도 당할 자 없었던 몽골제국의 7차례나 되는 침입에도 고려는 30여 년간 꿋꿋이 항거하였지만, 결국 대제국 건설의 강렬한 야망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고려는 장기간에 걸친 항거 덕분에 몽골제국(원 세조(쿠빌라이 칸)가 수도를 대도(현재 북경)로 옮기고 국호를 원으로 한 것이 1271년의 일이다. 이시기에는 아직 몽골 제국이었다.)이 정복한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완전히 복속되지 않고 자체적인 국호와 정권을 인정받는 독립국가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제국이었던 원나라의 테두리 안에 들어간 100여 년 동안 고려는 원조정으로부터 수많은 내정간섭에 시달려야만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왕자들은 인질로 원나라에 가야만 했고, 왕은 원 조정에서 마음대로 갈아치웠으며, 혼인 통교를 앞세워 원나라 공주가 고려의 왕비가 되어 들어와 고려 정치에 간섭하는 일이 생겼다. 한반도의 북쪽 땅은 원나라의 직접 통치구역이 되었고 원나라의 정복 전쟁을 돕는다는 명분하에 수많은 물자와 군사가 약탈에 가깝게 동원되어야만 했다.
그중에서도 원나라는 고려에 공녀라는 매우 야만적인 요구를 해왔다. 공녀란 말 그대로 여자를 공물로 바치는 것이다. 원나라의 공녀 요구는 80년간 정사에 남아 있는 것만 50여 회에 이르고 왕실이나 귀족이 개인적으로 요구한 일도 허다하였다고 한다.
원의 공녀 요구 이유는 유목민족 출신인 원나라 왕실에 여자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원나라에는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여자 외에도, 원의 귀족·고관이 요구하는 여자도 공급해주어야 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군인 집단 등의 혼인을 위해 많은 수의 여자를 필요로 하기도 하였다.
공녀는 고려 전체에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어린 딸을 공녀로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일찌감치 결혼을 시키는 일이 많아져 조혼의 풍습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공녀는 하층민에서만 차출하는 것이 아니라 원나라 왕실의 요구에 상응하는 정도의 신분을 가진 여자도 필요했기 때문에 귀족의 여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려에서 간 공녀들은 대개 원나라 궁궐의 궁녀나 고관 귀족의 처첩이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거리의 기생으로 팔려가 이국땅에서 슬픈 생애를 살아야만 하기도 했다. 공녀는 그만큼 고려 여인들의 앞날을 가늠할 수 없는 치욕이었기 때문에 개중에는 공녀로 뽑히면 가지 않기 위해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기황후도 이런 고려 공녀 중의 한 명이었다. 기황후의 본관은 행주이고 아버지는 기자오(奇子敖)이다. 기자오는 문하시랑평장사를 한 기윤숙(奇允肅)의 증손으로 음보로 관직을 할 정도였으니 그렇게 한미한 집안은 아니었던 것 같다. 기황후는 이 기자오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위로 오빠가 다섯에 언니가 둘 있었다. 기황후는 공녀로 뽑혀 1333년 고려 출신 환관이던 고용보(高龍普)의 주선으로 원왕실의 궁녀가 되었다. 당시 원나라 왕실에는 고려 출신 환관들이 많았다. 원나라는 소수의 몽고족이 다수의 한족을 다스리는 나라였기에 한족들이 중앙정부로 진출해 힘을 얻는 것을 극도로 막고 있었다. 하지만 지배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식자층이 필요했다. 유목민 출신으로 교양을 쌓을 틈이 없던 원나라 지배층들은 이런 요구를 고려에서 바친 글을 아는 환관들을 통해서 해결했다. 고용보도 고려에서 원으로 간 환관이었다.
고용보는 조국, 고려에서 온 기황후를 차를 따르는 궁녀 자리에 앉히고 황제인 순제의 눈에 띄게 했다. 당시 원나라 황제인 순제(혜종)는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 그는 왕실 정쟁의 틈바구니에서 고려의 대청도에 1년간 귀양을 간 경험이 있었다. 고려에서 살았던 경험 탓이었을까? 순제는 곧이어 기황후를 총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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