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토미 히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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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 이름없는 원숭이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이름없는 하급무사 기노시타 야우에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야우에몬이 죽은 뒤 히데요시의 어머니는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 히데요시의 이복동생(후의 히데나가)을 낳았다. 그의 주군이자 후에 일본을 휩쓸게 되는 오다 노부나가는 오다 노부히데의 삼남으로서 그의 이복동생인 노부유키와의 후계자 쟁탈전에서 승리한 뒤 주국인 시바가를 멸하고 오와리 일대의 패자가 되었는데 이와 비슷한 시기에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휘하에 들어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히데요시는 성안의 화장실 청소하는 일을 매우 잘하여 노부나가의 총애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일본 측 사료에는 그러한 내용이 없고 오다 노부나가의 시동으로서 그의 곁을 지키다가 총애를 받아 등용되었다고 한다.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총애를 얻은 일화를 몇 가지 소개해 보겠다.
* 노부나가가 외출할 때 도키치로는 노부나가의 신발을 품에 안아 그 온기가 식지 않도록 했다.
* 노부나가가 금 술잔을 우물에 빠뜨렸는데 히데요시는 한꺼번에 많은 양의 물을 우물에 부어 금술잔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그 술잔을 건져 노부나가에게 바쳤다
* 시동 시절, 도키치로가 노부나가에게 차를 대접할 때 노부나가가 ``어떻게 나의 입맛을 알고 차를 이렇게 잘 끓었냐``라고 물었었는데 도키치로는 차를 대접하기 전 자기가 먼저 맛을 보아 차 맛을 조절한다고 아뢰었는데 노부나가는 감히 자신의 찻잔에 입을 대었다며 노발대발했다. 도키치로는 당황하지 않고 신중하게 행동하여 노부나가 님의 차에 독이 들어있을까 하여 자신이 맛을 본것이라고 변명하니 노부나가는 그 정성을 갸륵하게 여겼다고 한다.
2. 원숭이의 출세 (1)
장인인 사이토 도산이 암살당한 뒤 적대세력에 둘러싸인 노부나가는 일단 자신의 힘이 미약하다고 생각하여 성급히 움직이지 않았으나 동해도 최대의 세력인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천하의 패권을 노리고 교토로의 상경을 위해 2만 5천의 대군을 거느리고 오와리로 침공해 오니 노부나가는 이제 북으로는 사이토 요시타츠 남으로는 이마가와 가문의 대군을 상대해야만 하는 절대절명의 위기에 놓이고 말았다. 당시 노부나가는 최대 3천의 군세만 동원할 수 있었으며 그나마 북쪽의 사이토 요시타츠를 견제해야했기 때문에 그 군사들도 다 동원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노부나가는 자신의 거성에서 술잔치를 벌여 ``인생 50년``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출전하였고 비가 내리는 야음을 틈타 오케하자마에 주둔하고 있던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본군을 급습했다. 스루가로부터 오와리까지 기나긴 행군을 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군대는 매우 지쳐있었으며 더군다나 한밤중에 받은 기습이었기 때문에 이마가와 군은 제대로 대항도 못해보고 궤멸되고 말았으며 그 수장인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목은 잘려 노부나가 군의 창에 꽂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군대가 오케하자마 대전에서 대패한 뒤 마쓰다이라 모토야스(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옛 이름)는 이마가와 가문으로부터 독립하여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으니 노부나가는 후방의 위협을 떨쳐내고 미노의 사이토 요시타츠와의 대전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노부나가는 장인인 사이토 도산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하에 대군을 이끌고 수차례 미노로 침공했으나 사이토 가문의 가신 다케나가 시게하루의 책략에 말려 번번이 패퇴하고 말았다. 노부나가의 가신 기노시타 도키치로는 전쟁이 장기화 될 것이라 생각하여 노부나가에게 미노 일대에 성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 노부나가는 이를 받아들여 도키치로는 스노마타에 성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당시 사이토 가문은 요시타츠가 요절하고 그의 아들인 시이토 타츠오키가 가독을 승계한 상황이었는데 타츠오키는 술과 여자에 빠져 헤어나오질 못했고 결국 히데요시가 스노마타에 성을 쌓도록 허용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다케나가 시게하루는 사이토 타츠오키에게 환멸을 느껴 그의 거성인 이나바 산성을 10명 남짓한 부하들만 대동하여 함락시켰다. 사이토 가문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노부나가는 시게하루에게 성을 넘기고 오다 가문에 사관하라는 서신을 보냈으나 시게하루는 성을 타츠오키에게 돌려주었고 그 길로 사이토 가문을 떠나 유랑하게 되었다.
예전부터 다케나가 시게하루라는 인물을 눈여겨보고 있었던 도키치로는 낭인이 되어 유랑하는 시게하루를 찾아가 오다 가문에 들어올 것을 권유했지만 시게하루는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도키치로는 이에 굴하지 않고 세 번이나 찾아가 시게하루를 설득하니 그의 정성에 감동한 시게하루는 도키치로의 사관 제의를 받아들여 오다 가문에 들어갔고 노부나가에 의해 히데요시의 직신으로 배속되었다. 최후의 보루 시게하루까지 잃은 사이토 가문은 결국 오다 가문에게 미노 일대를 빼앗겼으며 노부나가는 미노 일대를 자신의 수중으로 넣은 뒤 천하포무를 선포하여 자신이 일본의 천하를 거머쥐겠다는 야망을 만천하에 과시했다.
3. 원숭이의 출세 (2)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는 미요시 나가요시에 의해 교토로 추방당했으나 후에 생각을 바꾼 미요시 나가요시와 화해하여 교토로 돌아왔고 마쓰나가 히사히데의 감시를 받는 신세에 놓였다. 그는 몰락한 무로마치 바쿠후의 권위를 일으키기 위해 각지의 다이묘들에게 상경을 요구했으나 이미 몰락한 무로마치 바쿠후의 위상 때문인지 대부분의 다이묘들은 이를 무시했고 오직 의리의 화신인 우에스기 겐신과 오와리와 미노 일대를 다스리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만이 이에 호응하여 상경, 세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알현했다. 이때 겐신은 쇼군의 권위와 체면을 생각하여 상경한 것이었으나 노부나가는 교토를 수중에 넣을 생각으로 정탐을 온 것이었다.
쇼군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고 있던 마쓰나가 히사히데는 이러한 쇼군의 행동을 위험요소로 판단하여 쇼군을 암살했으며 이후 교토를 탈출한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의 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에치젠의 아사쿠라 요시아키를 찾아가 교토로 상경하여 미요시 가문을 몰아내고 무로마치 막부를 재건시켜줄 것을 요청했으나 의심 많은 요시카게는 이를 거부, 결국 요시아키는 에치젠을 떠나 노부나가를 찾아가니 교토 상경을 학수고대하고 있던 노부나가가 덩굴째 굴러들어 온 이 호박을 걷어찰 이유가 없었다. 노부나가는 교토로 상경하여 쇼군을 살해한 마쓰나가 히데요시의 항복을 받아내고 무로마치 바쿠후를 재건, 요시아키를 쇼군으로 추대한 노부나가는 에치젠의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굴복시키기 위해 상경을 요구했다. 그러나 요시카게는 노부나가가 자신에게 신종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이를 거부, 노부나가는 상경을 거부한 아사쿠라 요시카게를 조정의 명을 거역한 역적으로 선포했다. 우선 노부나가는 아사쿠라 가문과 손을 잡고 있던 아자이 가문의 가주 아자이 나가마사에게 자신의 여동생 오이치를 시집 보내 후방의 위협을 제거, 자신의 동맹국(사실은 가신신세)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군대까지 동원하여 에치젠을 향해 진격했다. 히데요시도 종군하여 전쟁에 참여했는데 초반 거칠 것이 없이 진격하던 노부나가의 군대는 후방의 아자이 나가마사의 배반으로 포위당한 쥐새끼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당시 일본에서는 주군이 전장에서 위기에 처하면 가신이 목숨을 걸고 후방을 지켜내는 것이 도리였으나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노부나가의 가신 그 누구도 감히 함부로 나서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스스로 후방을 책임지겠다고 선언하여 결사대를 이끌고 노부나가의 퇴로를 확보, 노부나가는 무사히 본토로 후퇴할 수 있었다. 이 일로 노부나가는 물론 그동안 히데요시를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가신들도 히데요시의 용기에 감탄, 오다 가문 내에서 그의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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