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시대의 금속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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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세종시대의 금속기술
세종(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금속을 보 면 금속활자를 꼽을 수 있다. 과가 신소 재 공학부로 금속을 다루는 우리 과에 게는 적합한 소재라고 할 수 있다. 금속 활자는 1234년 고려시대 때 세계에서 최초로 발명했다. 이것은 서양의 구텐베 르크가 발명한 금속활자보다 200년이나 앞선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무 구정광대다라니경”은 710년경에 만들어 졌는데 이것은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 물로 알려진 일본의 불경보다 50년 이 상 앞선 것이다.
금속활자가 탄생한 것도 목판 인쇄술에서 비롯된 기술의 발달에서 나온 것이다. 1234년 처음으로 금속활자로 “고금상정예문”이란 책을 찍어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 인쇄물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 남아 있는 금속활자 인쇄물중 가장 오래 된 것은 “직지심경”이다.
금속활자가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고대의 청동기 기술을 시작으로 한 고려 때까지의 청동기 기술, 특히 종을 만들던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발달한 금속활자는 조선에까지 이어져 태종과 세종 때는 발전된 기술로 새로운 활자를 만들어 책을 인쇄해 내는 데 성공했다. 조선시대의 금속활자 기술을 보면 주조술과 조판술을 바탕으로 보다 발전된 인쇄술을 만들었다. 세종시대의 금속활자를 살펴보자.
1. 세종시대의 금속활자
◆ 경자자
경자자는 세종 2(경자·1420)년에 계미자의 단점을 보완하여 주성된 동활자이다. 주조기간은 세종 2년 11월에 착수하여 7개월이 걸려 완성하였다. 자본은 계미자의 자본과 같이 경연 소장의 시, 서, 좌씨전 등으로 하였으나, 계미자가 남송본의 자체를 바탕으로 한데 비하여 경자자는 원대 전후 무렵까지의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자체에 해당된다.
주조된 활자는 대자와 소자였으나, 자수는 알 수 없다. 활자의 모양은 네 면을 낸 추형이었으며, 크기는 대자 1.1 1.3㎝, 소자 1.1 0.6㎝이었다. 경자자는 계미자에 비하여 한 단계 발전된 활자였으나 갑인자에 비하면 주조의 솜씨와 활자모양의 정연한 정도가 훨씬 떨어진다.
활자의 모양은 계미자가 밀랍에 잘 식자될 수 있도록 끝을 둥근 추형으로 만들었던 것에 비하여 경자자는 네 면을 낸 추형의 활자로 만든 것이다. 경자자의 조판술은 계미자에 비하여 계선이 위아래 변에서 떨어지는 고착식 인판틀로 개량되었으나, 갑인자의 조립식 인판틀에 의한 조판술에 비하면 활자의 크기가 일정치 않아 옆줄이 잘 맞지 않고 다소의 출입이 있다.
그러나, 인쇄의 능률은 계미자에 비하여 크게 증가되어 하루에 20여지를 인출해낼 수 있었다.
◆ 초주 갑인자
초주 갑인자는 세종 16(갑인·1434)년에 경자자가 가늘고 빽빽하여 보기가 어려워 다시 금속으로 주성한 동활자로 위부인자라고도 한다. 이천의 감독아래 장영실과 이순지 등이 업무를 관장하여 그 해 7월부터 2개월이 걸려 20여만의 대자와 소자를 만들어낸 것이다. 자본은 경연에 소장된 효순사실, 위선음즐, 논어 등으로 하고, 부족한 글자는 뒤에 세조로 즉위한 진양대군이 모사한 글자로 보충하였다.
활자의 모양은 네모가 반듯하고 평평하였으며, 우리나라 금속활자의 백미로 손꼽히고 있다. 활자의 크기는 대자가 1.4 1.6㎝, 소자는 1.4 0.8㎝이었다. 갑인자를 주조하는데 관여한 인물들이 당시의 천문기기를 제작하는 과학자나 기술자였던 만큼 활자의 모양이 자못 정교하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http://www.jikjiworld.net/index.jsp
http://cafe.naver.com/rpfksdmlqka.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55
http://cafe.naver.com/0120070608.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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