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조약 보고서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16.04.16 / 2016.04.16
  • 19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1,0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본문내용
report
―――――
“강화도 조약에 대해.....”
먼저 저희는 교과서에서도 배울수 있는 따분한 일본의 오리지널 역사에 대한 것 보다는 “강화도 조약”이라는 한 부분의 역사에 대해서 깊이있게 되짚어 보고자 합니다. 교수님 이하 학우들의 많은 양해 바랍니다.
‘열강의 제국주의’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초까지의 조선사회는 커다란 역사적 변동기였다. 이 시기에 조선은 중국중심의 세계질서로부터 이탈하여 근대적 국제질서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서구열강과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에 대처하고 국내 문제를 해결하면서 근대민족국가를 수립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당시 조선의 외교는 중국과 일본과의 전통적인 사대교린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그 밖의 서양은 야만으로 치부하여 철저히 배척하였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거친 서구제국주의 열강들은 동아시아의 기존질서를 크게 동요시키면서 시장개척과 값싼 원료공급지의 확보를 위해 동아시아에 침입하였다.
서구열강의 근대적 무기 앞에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각국은 무력하였고, 일본 역시 미국에 의해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때까지 독자적인 문화권과 생활권을 유지하고 있던 조선사회에도 서양세력이 침입하였다. 이들은 주로 한반도 해안에 대한 탐사와 측량에 나섰으며, 때로는 통상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조선은 이러한 서양의 도전에 대해 천주교에 대한 경계나 박해를 강화하였다. 특히 이양선의 잦은 출몰과 북경의 함락소식은 조선사회를 뿌리 째 흔들어 놓을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에 조선왕조는 서양의 통상 요구를 차단하면서 전통적인 체제를 고수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서구열강과 일본의 조선에 대한 팽창주의정책은 가속화되었으며 조선은 점차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외부로부터의 도전은 조선왕조의 성패가 달려 있음은 물론 자칫하면 식민지로 전락할 수도 있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당시 조선의 상황’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1820년 영조의 현손 남연군구(南延君球)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7세 때에는 아버지를 여의고 사고무친(四顧無親)의 낙방 왕손으로 불우한 청년기를 보내었다. 21세가 된 1841년 (헌종 7년)흥선정(興宣正)이 되었고, 1843년에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
고종이 왕위에 오를 당시 조정은 안동 김씨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들은 순조 이후 반세기 이상을 계속해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헌종의 어머니이자 효명세자(익종)의 부인인 신정왕후 조씨는 이같은 권력 구도를 깨트 리기 위해 남연군의 아들 이하응과 결탁하여 그의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게 된다. 둘째 아들 명복을 즉위시키기 위한 이하응의 계략은 치밀했다. 안동 김씨 세력의 경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건달들 과 어울려 지내는가 하면 안동 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을 하기도 했다. 이같은 호신책 덕분으로 목숨을 부지 한 그는 철종의 죽음이 임박하자 익종비 조대비와 연줄을 맺어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을 왕위에 앉히려 한다. 조대 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안동 김씨의 세도에 짓눌려 지내던 처지였기에 이하응과 뜻을 같이하게 된다. 1863년 12월 철종이 죽자 조대비는 이하응의 둘째 아들 명복을 양자로 삼아 익종의 뒤를 잇게 하고 자신이 수렴청 정을 하였다. 그리고 이하응을 흥선대원군으로 봉하고 섭정의 대권을 그에게 위임시켰다. 이로써 고종을 대신한 흥 선대원군은 향후 10년 동안 권력을 쥐고 자신의 의지대로 정사를 운영하게 된다.
조선시대에 외국과의 통상을 제한하여 교류관계를 맺지 않았던 정책으로 우리 나라는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외국과 활발한 교역을 맺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쇄국정책을 고수하여 중국과 일본 두 나라만의 사대교린 정책을 시행했다.
조선말기에 이르러 천주교가 유입되고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본격적으로 문호개방을 요구해왔다. 천주교 선교사들의 선교수단으로 교육(敎育),학문(學文), 예술(藝術) 방면까지 광범위하게 포교활동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군사적 유입은 아니었으나 기존의 주자학(朱子學)의 신념체계를 흔들어 놓는 큰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사상적 침투는 주자학적 사상에 젖어 있는 조선 왕조의 정책 결정을 맞고 있던 사람들로 하여금 위기감을 느끼게 하였다. 또한 19세기에 들어와서 서구 열강들은 제국주의로 약소국가의 영토를 침범하고 아시아의 제국(諸國)에서도 침략정책(侵略政策)을 감행하였다. 이러한 서구 세력의 군사, 종교, 경제적 침투는 조선인들에게 자기 보존에 대한 위기의식을 고조시켰다. 이 상황에서 조선 왕조의 대응은 서양제국에게 문호를 개방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신 문물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철저한 쇄국정책으로 외세의 침투를 적극 저지하느냐 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이에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선택했다.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역사왜곡] 역사왜곡과 한일관계
  • 보고서를 전폭 지지하는 결의안을 채택함으로써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촉구하였다. 이 결의안은 전문에 모든 유엔 회원국이 일본 정부의 전시성 노예 문제 왜곡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분명하게 하였다. 즉, 과거에 성폭행과 여성에 대한 폭력을 자행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유엔회원국들이 조사와 기소, 처벌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와 관련해 쿠마라스와미 보고관은 일본정부는 96년 특별보고관의 권

  • 갑오개혁론 레포트
  •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우리 나라가 근대화된 시점은 언제였는지 새삼 고민해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근대화는 외세에 의해 이루어진 측면이 많고, 완벽한 주체적인 근대화가 아니었다는점에서 약간은 아쉽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도 우리나라의 옛 관습과 서구 사상에서 갈등이 비롯되고, 아노미 현상이 나타나고, 문화 지체 현상이 벌어진느지도 모르겠다. 또한 우리나라가 당파싸움에 몰두해 있을 시간에 많은 나라에 사신을 보내

  • [국제정치] 한미동맹의 변화
  • 보고서는 한국정부가 제한된 핵무기와 미사일 능력을 10년 이내에 개발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전략적 위치와 핵무기 능력을 가지려는 한국의 어떠한 노력도 주변국들, 특히 북한과 일본에게 미칠 영향력으로 인해 우리의 우려는 전반적으로 높다. 한국의 핵무기 보유는 일본뿐만 아니라 러시아, 중공, 그리고 우리 자신이 직접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이 지역에 중대한 불안정을 초래할 것이다. 전쟁이 발발할 경우 북한에 소련이나 중국이 핵무기 지원

  • [한국근현대사] 을사조약은 왜 무효인가
  • 을사조약은 왜 무효인가?1. 을사조약의 배경과 그 결과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러일 전쟁에서도 일본이 승리를 하였다. 명성 황후를 죽인 사건이 을미사변으로 을사조약 즉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 박탈을 위하여 조약을 맺었다. 첫 번째 강화도 조약 이후 우리나라의 조약 을사조약이다.을사조약의 내용은 을사보호조약 제2차한일협약 을사오조약(乙巳五條約) 을사늑약이라고도 한다. 제3차 러일협약(露日協約) 체결을 계기로 러시아와

  • 을사조약은 왜 무효인가?
  • 조약’Ⅳ. 을사조약이 무효인 10가지 이유(학술심포지엄)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이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을사늑약 무효인 이유 10가지Ⅰ. 을사조약의 배경과 그 결과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러일 전쟁에서도 일본이 승리를 하였다. 명성 황후를 죽인 사건이 을미사변으로 을사조약 즉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 박탈을 위하여 조약을 맺었다. 첫 번째 강화도 조약 이후 우리나라의 조약 을사조약이다.을사조약의 내용은 을사보호조약 제2차한일협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 최근 판매 자료
    저작권 관련 사항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레포트샵은 보증하지 아니하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됩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