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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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세계지리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
-분쟁과 소외
팔레스타인에서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위의 사진은 길한복판에 탱크와 군인들이 주둔하고 그것을 어린아이가 피하고 있어 더욱 분쟁의 참혹성이 드러난다. 팔레스타인 땅은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잇는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강대국들의 지배권을 둘러싼 싸움터였다. 종교적으로도 팔레스타인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3대 종교의 성지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이 땅은 팔레스타인인(아랍인)들의 땅이었다. 하지만 영국의 모순된 외교, 유대인의 시온주의 운동, 연합군 측의 압력 등으로 이 땅에 이스라엘 국가가 건설되기에 이르렀다. 이스라엘은 2008년 12월 27일 가자지구를 공격했다. 2009년 1월 17일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휴전이 선언될 때까지 1천 3백여 명이 사망했고 어린이 2천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스라엘 군은 학교 병원 사원은 물론이고 유엔의 학교와 구호물품 창고까지 폭격하는 무차별 공격을 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인간방패로 사용한것도 모자라 제이툰 지역에서는 사람들을 한 집에 강제로 몰아넣은 다음 그곳에 폭탄을 떨어트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이스라엘 군이 가자지구 내에 주둔해 있으며 가자지구를 철저히 봉쇄하고 있다. 바로 이점에서 분쟁과 더불어 소외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스라엘에 의해 쫒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요르단으로 피해갔다. 그러나 그 당시 요르단 정부는 이스라엘의 지원을 받아 팔레스타인 난민 수천 명을 학살했다. 거기다가 레바논으로 쫒겨난 팔레스타인들을 이스라엘이 미국의 지원으로 레바논을 침공해 팔레스타인들을 살해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건국 이후 팔레스타인에서 쫒겨난 난민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그곳에 전쟁을 일으켜 학살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학살에 저항하여 ‘인티파다’라고 불리는 항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럴수록 이스라엘 군은 더욱 잔인하게 억업했다. 8천명의 주민들에게 23시간 통행금지를 강요했고,모든 활동을 금지 시키는 것도 모자라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체포해 팔을 부러뜨리기도 했다.
다른 열강들이 처음부터 간섭하지 않았더라면 중동전쟁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현재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각자 편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모두 외부 열강들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행동이었고 과거와는 관계없는 팔레스타인의 후손들과 죄 없는 어린 아이들까지도 피해를 입고 있어 안타깝다. 이스라엘에 폭격에 맞서 폭탄을 난린 팔레스타인의 선택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저항을 할수록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이 공격을 했다는 명분으로 또다시 폭격을 날리고 사람들을 학살한다. 왼쪽의 표는 이스라엘인들의 인식을 조사한 표이다. 저 설문조사가 이슬라엘인들의 모든인식을 대변할 수는 없겠지만, 평균적으로 ‘전세계가 이슬라엘에 대해 적대적’이라며 분쟁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는 듯하다. 세계적으로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분쟁 반대 운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외부에서 아무리 운동하고 시위해봤자 변하는 것이 없는 것 같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분쟁의 잔인함을 느끼지 않는 한 말이다.
이슬람과 힌두교의 충돌과 조화, 다양성 속의 융화한 델리 술타나트 건축
1192년,무함마드 군대와 북인도 힌두 왕국 프리트비 초한 왕조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쟁을 계기로 이슬람은 북인도에 본격적으로 세력을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북인도에서 아이박이 인도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인도 역사상 최초로 이슬람 왕조를 설립했다. ‘힌두’와 ‘이슬람’ 성격이 극명하게 다른 이 두 종교 안에서 역사·문화·언어 등 사회 모든 분야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예술, 특히 건축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원과 무덤의 건축 표면 장식에서 힌두교와 이슬람은 극명한 차이를 드러냈다.
무슬림들이 북인도, 특히 델리를 정복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기존 힌두교나 자이나교 사원을 부수고 그 자재를 써서 이슬람 사원을 지은 것이다. 왼쪽 그림처럼 ‘이슬람의 힘’이라는 뜻의 콰툴 이슬람사원이 대표적이다. 이 사원 안에 있는 높이 72.5m의 석탑 쿱툽 미나르가 ‘이슬람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한 전승탑’이라고 해석된다. 이 사원 중정(中庭)의 동서남북 사면에 열주(列柱)가 있는데, 앞서 언급했듯 힌두교와 자이나교 사원의 건축자재를 사용한 탓에 이슬람에서 금지된 동물의 묘사나 푸르나 칼라샤(purna kalasha) 같은 힌두교 문양이 그대로 사용되었다. 델리 술타나트는 투글락 왕조 시기에 가장 활발하게 건축 활동이 일어난다. 이 시기 건축의 특징은 건물이 대개 무겁고 육중한 느낌을 주면서 뒤로 기우는 경사진 벽을 지닌 건물들이었으나 후기에는 건물의 표면을 석회로 두껍게 바르고 그 위에 장식 효과를 내기 위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첫 번째 그림은 8각 무덤이다. 이 8각 무덤과 콰툴 이슬람 사원에 자리한 높이 72.5m의 석탑 쿱툽 미나르에서 영향을받은 조그만 정자 모양의 차트리와 베란다에서 아래로
8각 무덤 타지마할
내린 처마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해 타지마할에서 그 정점을 이루었다. 다섯 왕조에 걸친 델리 술탄의 320여 년 역사는 무갈 왕조에게 패하면서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이 인도아대륙에 가져온 사회·문화·정치·종교적 제도의 변화는 다양성 속의 융화라는 인도의 특성을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 예술, 특히 건축 분야도 예외는 아니어서 아치와 돔으로 대표되는 이슬람 건축 기법과 아라베스크나 타일, 기하학적 문양 등의 건축 표면을 장식하기 위한 기법은 현재까지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복하여 대립되는 나라에서도 정치적으로는 화합하기 어렵지만 예술적인 면에서는 화합하거나 존중해줄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힌두교 양식 건물을 부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재를 이용하여 다시 이슬람교의 건출물을 건설한 경우를 보면 자신들의 종교가 우선이기는 하지만, 어느정도 힌두교의 종교를 인정하고 불결한것처럼 배척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인도를 대표하는 타지마할에서도 과거 이슬람교의 양식을 바탕으로 지은 건축물 양식을 엿볼 수 있어 종교는 다르지만 예술면에서 융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박문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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