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교회와 프랑크 왕국과의 제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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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8세기 맺어진 프랑크 군주와 교황 간의 제휴에는 다양한 배경 상황들이 있었다.
1.비잔티움 제국과 로마 교황 간의 불화
1.1.이슬람·롬바르드의 위협
로마 교회의 전통적인 수호자였던 비잔티움은 새롭게 부상한 이슬람의 위협에 골몰하여 로마를 보호할 여력이 없었다. 8세기 초, 비잔티움 제국이 이슬람 세력을 격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전쟁을 치르느라 재정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였던 이탈리아에 침공하여 6세기 중반 왕국을 세웠던 롬바르드족이, 호전적인 리우트프란트의 통치기인 8세기 전반기에 세력을 급격히 확장하였다. 728년, 비잔티움 제국은 롬바르드족에 의해 라벤나시를 점령당했고, 리우트프란트 왕이 사망할 당시에는 로마 공국을 제외한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와 북부 대부분의 지역을 롬바르드가 장악하게 되었다. 사실 롬바르드 족은 이미 기독교화 되어있었고 로마 교회에도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로마를 점령한다 하더라도 교황을 폐위하거나 교황의 종교적 기능을 박탈할 염려는 없었다. 그러나 교황은 기독교 세계 전체를 지배하는 교회의 지배자이자, 로마를 중심으로 서방 세계 전체를 지배하는 세속적 지배자가 되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따라서 롬바르드 왕국 하에서 이탈리아 지역에만 국한된 종교적 교구로서의 역할에 만족할 리가 없었고, 로마 교황청은 롬바르드 족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 줄 다른 세력을 물색할 필요가 생긴다.
1.2.레오3세의 성상 숭배 금지령
726년, 비잔틴 제국의 황제 레오 3세는 기독교적인 숭배에서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성상의 숭배를 금지하는 령을 내린다. 이는 콘스탄티노플과 로마 교회 간의 심각한 분쟁을 초래했다. 게르만족에 대한 포교 활동을 통해 서방의 광대한 지역으로 세력을 넓혀가던 로마 교회는, 게르만족 포교에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던 성상을 통한 선교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는 성상숭배 금지령에 반대한 이유 중 일면에 불과했다. 종교적인 최고 지배자가 되려고 했던 야욕으로 로마 교회는 베드로의 계승이론을 이어갔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다른 지역의 교회보다 우월한 종교적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교황의 베드로 계승이론(Petrine Theory)은, 교황의 관할 하에 있는 로마교회는 사도중의 사도인 베드로가 세운 교회이기 때문에 모든 교회 중에서 가장 으뜸이라는 것을 설파하고 있다. 로마주교는 초대주교인 베드로로부터 그 권위를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에 기독교 세계의 여타 주교들보다 우월한 권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황의 베드로 계승이론은 2세기 말경에 그리스어로 작성되었던 위조문서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 가짜 문서에 따르면 로마인들이 보는 앞에서 베드로가 교황 Clemens 1세에게 매고 풀 수 있는 권능을 위임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 문서는 중세기 내내 베드로의 계승자로서의 교황 군주정치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확실한 역사적 전거인 것처럼 거듭 인용되었다. Walter Ullmann, Medieval Political Thought (Penguin Books, 1975), pp.23-24.
그 결과 서방 세계에서 로마 교회는 베드로의 계승자로서 절대적인 존재로 인식되었고, 교황들은 자신들이 기독교 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기 수도 천도 후 비잔티움 제국은 로마보다 우위에서 그들의 보호를 명분으로 지속적인 간섭과 규제를 가해 왔고, 비잔티움의 황제교황주의에 불만이었던 로마 교회는 비잔티움 황제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적절한 명분이 필요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외부로부터 로마 교회에 대한 보호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성상 숭배 금지령을 발함으로써 이러한 명분을 제시한 것이다.
이러한 비잔틴과 로마 간의 불화는 그레고리우스 2세가 레오 3세에게 727년 보냈다는 서신을 통해 상세히 알 수 있다. 서양중세사 자료집, p.24-25
1.3.로마 교회의 영향력 확대 (성 보니파키우스)
로마 교황의 충복이었던 성 보니파키우스에 의해, 8세기 교황의 영향력은 알프스 북부를 넘어서까지 확대되었다. 성 보니파키우스는 게르만족의 기독교 편입에 크게 공헌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프랑크와 로마 교황청의 제휴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메로빙조 쇠퇴기에 찰스 마르텔은 수도원과 주교구의 재산을 마음대로 이용했으며 교회재산의 전면적인 세속화를 야기했다. 이렇게 부패한 프랑크 교회의 상황에 대해 보니파키우스는 교황의 대리인으로서 프랑크 교회의 탈세속화를 위한 개혁에 적극 임했다. 찰스 마르텔의 후계자인 페핀와 카를로만은 보니파키우스의 개혁에 호의적이었으며, 페핀은 프랑크 왕국과 교황청 사이의 협력과 조화라는 보니파키우스의 이상을 받아들였다. 보니파키우스는 이후 카롤링 왕조의 첫 왕인 페핀에게 왕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하는 의미를 내포한 세례를 내리기도 했다. 이로써 프랑크 교회와 로마 교황청의 관계는 강화되고 프랑크 왕국과 교황청 사이의 제휴가 가능케 되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로마가 비잔틴 제국 대신 새로운 수호자로 선택한 프랑크 왕국에 대한 태도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3세가 프랑크 통치자 찰스 마르텔에게 보낸 서신에서 드러나 있다. 위의 책, p.25-26
2. 로마교회와 프랑크왕국의 제휴
2.1.메로빙 왕조의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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