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인간으로서의 왕도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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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세종은 형이자 세자였던 양녕대군을 두고도 아버지 태종의 뜻에 따라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실록에도 나와 있듯이 양녕대군이 방종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세종은 잠저에 있을 때 대궐이 꽁꽁 얼어붙은 추운 밤에도 밤을 새워 책을 읽었다고 하는데, 세종의 그런 태도는 태종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태종과 신료들은 여러 면에서 지적으로 압도할 수 있는 국왕을 필요로 했는데, 그 이유는 태조 이성계 집안이 무인가문이었기에 ‘아는 것이 많다’는 것의 의미가 남달랐고, 성리학을 국교로 천명한 조선왕조 특유의 상황 하에서 성리학에 대한 많은 지식은 국왕의 권위를 나타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태종은 양녕에 대해 오랜 세월 동안 인내심을 갖고 기회를 주었고, 이 사이 세종에게는 체계적인 교육보다는 잡기를 배울 기회를 많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세종의 균형 잡힌 시각 형성에 도움을 주었던 것 같다. 세종이 양녕 대신 왕위에 오르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논란이 많았으나 왕위에 오른 뒤 그의 치적은 논란을 잠재울 만한 것이었다.
우선 그는 ‘정치의 본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예로 태종이 공신들과 외척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할 때, 자신의 가정까지도 흔들릴 번한 상황에서도 세종은 흔들림 없이 일상적인 일을 수행하였다. 어찌 보면 무능하거나 지나치게 무관심했던 것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그 보다는 오히려 상왕 태종이 정치세계에서 휘두르는 ‘잔혹함의 미덕’을 충분히 이해하고, 또 수긍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본다. 이후 상왕으로서 군권에 대해 간섭하던 태종이 죽은 뒤 세종은 본격적으로 그의 정치적 능력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세종은 다방면에서 능란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우선 외교관계에 있어서 훌륭한 수완을 보여주었다. 세종 시대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중국과의 관계였고, <세종실록> 곳곳에서 중국 사신들의 과도한 요구들이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세종은 중국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고 수용하였는데, 그 이유는 당시 조선의 처지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그렇게 해서라도 명나라와 관계를 돈독히 하려는 세종의 계산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록을 보면 태종에서 세종으로 이어지는 조선의 안정된 치세는 주변국들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 5년(1423년)을 전후해 ‘조선에서 살고 싶다’며 들어오는 주변국 사람들의 집단 귀화(歸化)현상이 그것이다. 왜인과 여진족들이 집단적으로 귀화한 이유는 일차적으로 배고픔으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이유가 있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조선의 어진 정치’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외교와 관련하여 북방정책에서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1432년 12월 초 ‘이만주’는 400여 기(騎)의 여진 오랑캐를 이끌고 여연 지역에 침입하여 쑥대밭을 만들었다. 워낙에 예상치 못한 기습인데다 그 규모도 커서 피해가 막심했다. 그러나 세종은 이 사건을 이용해 여진족을 제압하고 북방영토를 개척하는 기회로 삼기로 작정했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 2, 3차에 걸친 토론을 거쳐 최윤덕 등을 설득해 ‘북정’을 감행한 것이다. 북정의 성패는 기만술과 정보 통제에 달려 있었다. 세종이 이 시점에 대규모 온천행차를 감행한 것은 아마도 이러한 상황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목적지인 온양온천에 머무는 23일간 세종은 겉으로 보기에는 ‘북정’과는 무관한 일을 하면서 지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여진족의 동태를 기록한 보고서를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고, 동맹가첩목아 등 압록강 일대의 여진족들이 파저강 지역의 여진족을 구원하려 할 경우 어찌할 것인가에 대한 ‘비밀 대책회의’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회의일수록 “절대 누설하지 말라”는 세종의 지시에 따라 비밀리에 진행되었고, 결과적으로 토벌은 대성공이었다. 세종은 파저강 토벌 과정에서 전투의 위험성과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집단적 지혜를 모으고, 고도의 기만책을 구사하여 훌륭한 군사전략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내정에 있어서 세종은 ‘지식경영’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회의하는 방식과 관련하여서는 ‘경연’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경연에 참석하는 신하들의 구성인데, <경국대전>을 보면 ‘말’을 맡은 언관, ‘일’을 주관하는 정승, 그리고 말과 일을 함께 담당하는 승지가 참여하게 되어 있었다. 세종의 회의 방식은 간단했다. “어찌하면 좋겠는가?”하고 문제를 던져놓고, 찬반 토론을 거듭하다가, 찬반의 논지가 분명해지면 모든 참석자들로 하여금 ‘계책을 각각 진술’하게 하는 방법이었다. 이 때문에 회의 시간은 다소 길어졌지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이 거의 다 드러나곤 했다. 덕분에 일을 맡은 재상들은 그 문제점이 해결될 수 있는지, 앞으로 어떤 대책을 마련할 수 있는지를 구상할 수 있었다. 세종에게도 인재를 가려내는 일은 어려운 것이어서 그 해법을 젊은 선비들의 생각에서 찾았는데, 과거시험 문제로 당시의 난제를 출제하여 신선한 아이디어를 듣는 것은 그가 자주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세종은 세 가지 이유, 즉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인재를 절실하게 구하지 않는 것, 국왕과 인재의 뜻이 합치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왕이 인재를 등용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인재 등용의 요체는 국왕의 마음먹기와 자기수양의 정도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종은 일관되게 ‘장점을 취하는’ 인사정책을 폈는데, 언관들이 황희, 김종서 등의 도덕성을 집요하게 공격했지만, 공적을 이룰 때까지 그들을 보호하면서 기다렸다고 한다. 그들이 ‘뛰어난 인재’라는 것을 확신했고, 공적에 의해 그들의 허물이 극복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황희의 경우 처음에 세종의 왕위등극을 반대했지만, 세종은 유배에서 풀려난 황희를 믿고 중용했다. 황희가 이 같은 신뢰를 받을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아무리 복잡한 사태도 그 핵심을 파악해 간명하게 정리해내는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다양한 인재 발굴 능력 때문이었으며, 세 번째 이유는 ‘국가의 저울추’ 역할 때문인데, 황희는 혁명과 건국 과정에서 소외되고 희생된 사람들이 조선왕조에 등을 돌리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세종은 국왕의 정책노선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비판해오는 황희의 조언을 최대한 수용했고, 조말생이나 하륜 같은 황희의 정적들이 파상적으로 공격해올 때 그를 지켜주기도 했다. 황희 역시 보답이라도 하듯, ‘파직사건’ 이후 줄곧 청빈한 재상으로서 대업을 보필했다. <세종실록>에서 인간 황희의 갖가지 스캔들이 정승 황희의 공적에 의해 승화되는 것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한국 정치에 참으로 희망을 주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세종이 정치, 그리고 행정가로서 보여준 탁월한 면모는 인재(人材)의 적절한 활용과 배치에도 있었다. 인사의 문제는 비단 과거의 문제만은 아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인사는 곧 만사라 하여 적절하게 배치되고 활용된 인재만이 성공을 이룰 수 있는 지름길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인재의 효율적인 활용과 배치를 세종은 이미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적절한 인재의 발탁과 집현전(集賢殿)의 운용이었다. 적절한 인재의 발탁의 대표적인 예로 장영실과 김종서, 박연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장영실은 본래 태종 이래 궁궐에 들어와 있던 관노 출신이었다. 그러나, 그가 과학 기술 등에 많은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된 세종이 그를 과감하게 발탁하여 그 재능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세종의 배려와 두터운 지원에 힘입은 장영실은 상호군의 지위에 까지 올라 이천 등과 함께 옥루기륜, 간의 등 각종 과학 기계들을 제작하여 조선의 과학 기술을 한 단계 높이는데 기여하게 된다. 천문학의 발전은 시계의 발명을 가져왔고, 이로 인해 발명된 앙부일구에서는 제작 과정을 연구해볼 때 당시 사람들이 해의 움직임과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물시계인 옥루는 중국 송, 원 시대의 모든 자동시계와 중국에 전해진 아라비아 물시계에 관한 문헌들을 철저히 연구한 끝에 고안한 독창적인 것으로서 당시의 중국이나 아라비아의 것보다도 뛰어나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세종은 또한 기술 학도들이 견문 유학을 할 수 있는 정책을 마련하여 장영실도 중국으로 유학을 떠날 수가 있었다. 또 김종서의 발탁도 주목해 볼만한 일이다. 본래 김종서는 문신 출신이었다. 문신 출신이던 그는 강직한 성품으로 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는데, 세종은 6진 개척이라는 국토 확장의 중대사에 그를 총 책임자로 삼아 그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었고, 이러한 세종의 기대에 부응하여 김종서는 6진 개척이라는 대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김종서에 대하여 주변 신하들의 시기가 많아지자, 세종이 “이 일은 종서가 있으나 내가 없으면 하지 못했을 것이요, 또 내가 있으나 종서가 없었다면 하지 못했을 일이다 ” 라고 극찬한 것에서도 알 수 있는데, 세종의 김종서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두터웠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외에도 박연의 발탁도 세종의 인재 발탁 중 성공한 사례에 속한다. 박연 또한 음악에 많은 소질은 있었으나 그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러던 중 세종의 아악 정리 과정에 있어 그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여 세종으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집현전은 세종대의 최고 학술 기관이자, 세종의 정치, 학문적 자문을 맡았던 일종의 싱크 탱크(The think tank)의 역할을 담당했다. 고려에 설립된 이래 유명무실해 진 집현전을 세종은 크게 확장하고 보완해서 많은 인재들을 양성하고, 그 인재들을 적절하게 배치함으로서 각 분야에 걸쳐 많은 공헌을 하게 되는데, 그 이면에는 학자 및 인재들에 대한 세종의 두터운 신임과 든든한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집현전에서 올린 실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다. 특히, 학문 진흥에 있어 집현전 주도로 편찬된 다양한 종류의 많은 서적들은 문화 국가로서의 조선의 면모를 한층 드높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특히 집현전 출신 인물들의 활동은 크게 두드러져 정인지 나 신숙주 같은 이들은 이후 세조, 성종 대에도 크게 활동하게 되었고, 성삼문등은 비록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되어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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