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대의 섹스스캔들 유감 동사건 과세종의 정치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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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세종대왕은 그 재위기간동안 훌륭한 업적을 이루어내었다. 학문, 문화, 과학기술, 예술분야에서 큰 발전을 하였다. 이런 세종시대에서도 아직 유교에 의한 사회윤리나 풍속이 완전히 자리 잡지 않아 부녀자의 간통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조선왕조 실록을 보면 세종대에 간통이나 이혼문제가 가장 많이 등장한다. 유금동사건, 이지살인사건, 친척을 포함한 뭇 남자와 간통한 사헌부 관리의 딸 동자사건, 양자부의 연쇄간통사건, 세자빈의 시녀와의 동성애사건 등 많은 간통사건이 일어났다. 이런 사건들은 조선 건국 초기의 혼란함을 잠재우고 사회안정을 이루어야할 세종에게는 큰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그중에서도 유감동 사건은 이들 치정사건과 성격이 달랐다. 유감동 사건은 그야말로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조정의 고위 관료들이 연루된 최대의 섹스스캔들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공직자에 대한 심각한 불신을 줄 수 있는 사건이었고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큰 문제가 되었다. 그리하여 유감동 사건과 대한 세종의 정치적 판단을 살펴보고자한다.
1. 간통사건이나 이혼문제에 대한 세종의 관심
세종대왕 시대에는 유난히 부부간의 이혼 문제, 또는 간통 사건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시기다. 세종 실록을 보면 부부간의 이혼 문제에 대한 논의나 간통 사건의 진위를 가리기 위한 논란, 또 그 처벌 문제에 대한 논쟁 등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개인의 사사로운 문제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는 이런 문제에 국가가 이렇게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낸 이유는 고려말부터 시작된 문란한 사회질서 때문이다. 고려말 국교였던 불교계가 타락하면서 사회를 이끌어갈 지배개념이 사라졌고 성도덕은 급격히 추락하였다. 새로운 왕조가 세워지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가정의 풍속을 바로잡는 일이었다.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세워진 조선왕조는 가정이 평안하고 가부장적인 체제가 정비돼 있을 때 국가의 안정도 이뤄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풍속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건국 초기에는 고려말기의 풍속과 생활모습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이어지는 경향이 짙었다. 법제 체제는 정비돼 가고 있지만 백성들의 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의 안정이 국외적으로도 나타나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며 또한 4군 6진을 개척해서 영토를 확장했다. 이는 국토를 확장하는 데에도 의미가 있지, 국경의 선을 확실히 하여 불안한 백성들의 마음을 추수릴 수 있게 했다는 데에도 큰 의미를 둘 수 있는 일이다. 이처럼 체제가 안정적으로 정비되고 국가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가 쌓여가자, 왕권은 점차 강화되기 시작한다. 뿔뿔이 흩어졌던 지방세력들이 중앙집권화를 통해서 하나로 모이게 되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국내외적으로 이렇게 안정적인 기틀을 만든 후에 백성들에게 유교적인 윤리를 보급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했다. 국가의 기반이 되는 유교이념이 바로 서야 진정한 국가성장이 이뤄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삼강행실도가 완성된 것도 이때이다. 유교윤리를 생활에 쉽게 적용할 수 있도록 만든 삼강행실도는 백성의 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이때부터 남녀 관계에 대한 여러 종류의 규제가 단순한 윤리적 덕목이 아닌 법으로 성립하게 된다. 따라서 간통죄는 단순히 도덕적인 지탄을 받는 대상이 아니라 법률적으로도 엄격하게 규제를 받는 죄가 되었다. 동시에 실록에도 이에 대한 많은 기록들이 남게 된다. 가정에 대한 풍속을 강화함에 따라, 간통죄를 그저 사사로운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 않고 국가의 안정과 긴밀한 연관이 있는 중대사로 보았기 때문이다. 세종은 이런 문제들을 은밀한 곳에서 끄집어내어 교화시키고 순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런 와중에 유감동사건이 발생하였다.
2. 유감동 사건
유감동은 검한성 유귀수의 딸로서 평강 현감 최중기에게 시집을 갔다. 그런데 최중기가 무안군수로 나갔을 때 함께 부임했다가 병을 핑계로 먼저 서울로 올라와 음란한 행실을 일삼는 바람에 쫓겨난 여인이다. 당시 유감동이 관계를 맺은 것으로 발설한 남자는 공식적으로 서른 아홉명. 더군다나 그 상간자들이 대부분 높은 벼슬에 있는 사람이거나 나라에 공을 세운 사람의 자식이어서 나라 안은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유감동에 대한 실록을 살펴보면
임금이 대언 등에게 묻기를, “사헌부에서 음부 유감동을 가뒀다는데, 간부는 몇이나 되며, 본 남편은 누구인가. 세족이 의관 집의 여자인가.”하니, 좌대언 김자가 대답하기를, “간부는 이승·황치신·전수생(·김여달·이돈 등과 같은 사람이고, 기타의 몰래 간통한 사람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사오며, 본 남편은 지금 평강 현감 최중기입니다. 중기가 무안 군수가 되었을 때에 거느리고 가서 부임했는데, 이 여자가 병을 핑계하고 먼저 서울에 와서는 음란한 행실을 마구하므로 중기가 이를 버렸습니다. 그 아비는 검한성 유귀수이니 모두 사족입니다.” (세종 09/08/17)
유감동이 실록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부분이다. 이후 추국을 통해 조정의 관료들이 연루되고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사헌부에서 계하기를, “유감동 여인의 간부로서 장연 첨절제사 박종지·행 사직 주진자· 전 판관 유승유· 내자 판관 김유진· 찰방 최심·길주 판관 안위·부령 이수동·진해 현감 김이정· 사정 김약회· 부사직 설석·여경·행수 이견수·전직 권격· 별시위 송복리· 급제 이효례 등이 더 나타났습니다.”하였다. (세종 09/08/30)
사건이 커지고 생각 이상으로 관련된 공직자, 양반이 늘어나자 세종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라의 지도계층인 양반과 관료들의 간통사건은 나라의 위신을 땅에 떨어뜨리고 공직자에 대한 심각한 불신을 낳게 한 사건인 것이다. 사건을 더 파헤칠수록 연루된 사람은 늘어나고 사건은 커져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사건을 더 파헤치기보다는 적당한 선에서 사건을 덮고자 한다.
장령 윤수미를 불러 말하기를, “추가로 나타난 유감동의 간부 중에서 이 여자의 근각을 알면서 간통하였더라도 그것이 사죄 전에 있은 사람과, 비록 사죄 후에 간통하였더라도 근각을 알지 못했던 사람은 모두 논죄하지 말라.”하니, 수미가 계하기를, “사죄 전인가 사죄 후인가를, 근각을 알았는가 몰랐는가를, 다만 유감동의 말로써만 사실을 가린다면 반드시 애정의 경하고 중한 것으로 정직하게 공초를 바치지 않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간부까지 사실을 점고한 후에야 만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은 문초함에 의하여 점고하는 것도 사실상 옳겠으나, 만약 부임하여 외방에 있는 사람은 잡아 오지 말고 그 일의 증거만 가지고 추고하라.”하였다. (세종 09/09/01)
‘사면 이전의 죄에 대해서는 묻지 마라’ 유감동 사건 연루자의 처벌 대상을 최소화하라는 세종의 지시였다. 세종 07년 극심한 가뭄이 들자 “형벌이 중도를 잃어 원통한 자의 탄식이 화기를 상하게 하지는 않았을까”(07/06/23)두렵다면서 전국에 사면령을 내렸는데, 그 사면 이전의 잘못에 대해서는 추궁하지 말하는 것이다. 세종은 유감동 사건으로 땅에 떨어진 국가의 권위를 지키고 유능한 인재를 구하기 위해 이런 판단을 내린 것이다. 9월 16일 사헌부가 세종에게 올린 보고서를 보면 유감동 사건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형벌을 정하여 아뢰었다.
실록의 보고서를 요약해서 보면
- 유감동과 간통한 전유성, 주진자, 김유진, 이효례, 이수동, 송복리, 안위, 등은 이여자의 지나온 내력을 살피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간통하고 욕심을 마음대로 부렸습다. 이자성은 비록 간통하지는 않았으나 간통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황피신은 나루터 아전으로서 지나가는 여자를 불러 간통했는데, 후에는 지나온 내력을 알면서도 계속 간통했습니다.
변상동은 이승이 첩으로 정해 거느리고 살 때 몰래 훔쳐 간통했으니, 그 마음과 행실이 불초 할 뿐만 아니라 여러 달 간통했으니 어찌 이여자의 지나온 내력을 몰랐겠습니까.
참고문헌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
-KBS 역사스폐셜 ‘조선시대에도 자유부인이 있었다’ 2000년 4월 29일 방송
-세종, 그가 바로 조선이다, 이한우, 동방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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