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역사 갈리 칸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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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갈리칸 예전은 초기 서방 교회의 지역 중 로마 이외의 장소에서 형성되어 사용된 의식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갈리칸 예전의 기원은 불분명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예전학자들은 이 의식들이 초대 교회에서 유래하여 차츰 로마를 벗어난 지역의 원주민들 사이로 확산되며 발전하였음에 일치된 견해를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이 의식은 로마 의식에 비하여 훨씬 다체롭고 정교하며 화려하다.
갈리칸 예배의식에 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이 7세기경으로 거슬러 올라가기에 그 이전의 예배 형식들은 알기가 어렵다. 지금 남아 있는 유일한 자료는 로마 의식서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리벨루스 미사 예식서’ 뿐이다. 이것은 약 100년 전에 칼스루히에서 사본이 발견된 것으로, 이것을 정밀 검사한 카브롤은 이 예식서가 7세기경에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갈리칸 미사 의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하나의 좋은 자료는 파리의 성 게르메인의 이름을 빌려 쓴 문서이다. 이 문서의 실제 저자는 게르메인보다 150년이나 후에 살았던 인물이다.
갈리칸 의식에서 주목할 만한 특징은 에배 가운데서 회중들이 갖는 위치인데, 예배 중 회중이 응답하는 순서들과 음악으로 진행되는 부분을 많이 두어서 회중의 역할 중요했다. 부제의 역할 역시 더 확대되어 회중들의 예배를 안내하는 일에서부터 연도를 인도하고, 성찬시 잔을 나누어 주는 일까지 하게 되었다. 본래 서방 교회에서는 제단을 가리기 위해 성소막을 설치하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부제의 역할이 그렇게 두드러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갈리칸 의식에서는 부제의 역할이 단순히 집례자들을 돕는 정도 이상으로 보다 중요시되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갈리칸 의식에서는 주기도문을 모든 회중들이 함께 암송하거나 적어도 집례하는 사람들 모두가 암송한 것으로 보인다. 갈리칸 의식에서 기도로 로마 의식에서처럼 그렇게 간결하지 않고 장황하게 진행되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갈리칸 의식은 같은 시기의 로마 의식에 비해 미적이고, 상징적이며, 극적인 면을 가졌으며 의식의 내용도 더 길었다. 그리고 갈리칸 의식은 고유 순서들이 매우 풍부해서 결과적으로 가장 융통성 있는 의식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나아가 의식이 거행될 때 매우 정교하고 웅장했으며, 향을 많이 사용한 특징이 있다. 로마 의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예배에서 중요하게 여겨진 순서는 성직자의 입당과 복음서 봉독이었다. 후에 대입당으로 이름지어진 입당 순서는 동방 교회로부터 유래했다. 예배는 자주 공동 집례로 이루어졌고 특별히 켈트 교회에서는 항상 공동 집례를 했다.
이 예전은 두 찬양대가 시편을 교송하는 가운데 성직자가 입당하면서 시작된다. 사제가 입당하여 제단의 자기 위치에 서면, 나머지 봉사자들은 그 옆에 선다. 입당송이 끝나면 사제는 회중들에게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라고 인사하며, 이 때 회중은 “당신의 영광도 함께” 하면서 응답한다. 그리고 헬라어로 키리에를 부르고, 이어서 강복송이 이어지는데, 7세기경에는 강복송 대신 영광송을 부르기도 했다.
기도가 있은 다음, 구약의 말씀을 봉독하고 영창을 부른 후 사도행전이나 서신서의 말씀을 봉독했다. 그리고 복음서를 봉독하기 전에 준비하는 의미로 강복송을 불렀다. 그리고는 복음경과 촛불과 향을 든 행렬이 들어온 후 부제가 복음서의 말씀을 봉독했다.
이어서 삼성송이 있고, 복음서에 기초한 설교를 행했다. 설교 후에 부제의 연도가 있었는데, 이것은 동방 교회의 연도와 거의 유사한 내용이었다. 각 절이 끝날 때 회중들은 ‘키리에 엘레이손’ 하면서 응답했는데, 그 의미는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것이었다. 연도 후에 사제가 기도를 드리고, 부제가 세례를 받지 않은 신자들을 돌려보냈다.
봉헌 순서에서는 먼저 성물(빵과 포도주)를 준비하고, 포도주에 물을 섞었는데, 이 때 시편을 교송했다. 그리고 옛 예전에서는 이때 신자들의 연도가 이어졌다. 그리고 성화에 있는 문구를 봉독하고, 사제가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를 드리고, 평화의 입맞춤과 함께 평화를 위한 기도를 했다. 다음으로 회중들에게 인사를 했으며, 수르숨 코다(마음을 드높이)로 모든 이들이 성찬 기도를 준비하도록 했다.
성찬기도는 긴 예비 기원으로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동방교회의 예비 기원에 비해서는 짧았지만 로마 의식의 예비 기원에 비해서는 긴 것이었으며, 그 내용도 다양하게 바뀌었다. 이어서 회중들이 상투스(거룩송)를 부른 후 수난을 회상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성찬 제정사가 있은 후 성삼위께 영광을 돌리는 기도로 봉헌 순서를 마쳤다. 어떤 갈리칸 의식에서는 이 때 중보기도가 나타났는데, 이것이 갈리칸 의식에 정규 순서로 있었는지 불분명하다.
성체분할은 가장 정교한 의식으로 기도와 함께 거행되었으며, 이어서 교송을 불렀다. 다음으로 빵과 포도주를 혼합했다. 주기도문이 있은 후 사제가 회중들에게 강복하고, 배찬과 영성체가 진행되었는데, 이 때 부제는 잔을 주었다. 성찬이 진행되는 동안 시편 34:8을 불렀으며, 성찬 후에는 감사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부제가 회중들을 돌려보냄으로써 예배를 마치게 되었다.
2. 개혁자들의 예배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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