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와 일본의 불교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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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삼국 중에서 입지적 조건이나 모든 면에서 가장 불리했던 신라는 불교문화를 받아들이게 된 법흥왕 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그동안 적지 않은 곡절도 있었지만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정복하여 역사 이래 처음이로 민족통일의 대업을 보게 되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 통일 하였음에도 그들의 좋은 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인색하지 않고 불교문화 역시 두 나라의 것을 수용하여 더 훌륭한 하나의 민족 불교문화를 형성시켰다. 통일이 이룩되고 부터는 안정된 환경에서 더욱 그 내면적인 심화를 가져와서 여(麗), 제(濟) 두 나라의 불교문화까지도 도 보태어진 민족의 불교문화를 완성시켰다. 통일신라시대의 불교문화는 바로 삼국시대의 연장이면서도 불교문화의 종합조화를 이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결과가 있기까지에는 훌륭한 대덕고승들의 배출과 뛰어난 그들의 노력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원효
진평왕 39년(617) 압량군(押梁郡) 불지촌(佛地村)에서 태어난 원효(元曉)는 고구려가 멸망하여 통일이 이루어진 문무왕 8년(668)에는 52세가 된다. 그를 통일 이후의 고승으로 본다면 그의 50대 이후의 업적을 위주로 하는 것이 된다.
그는 일찍이 중국으로 가서 구법할 뜻을 품고 의상과 함께 육로로 당을 향해 갔으나 고구려에서 잡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10년이 지난 뒤 백제가 망하여 바닷길이 열리자 다시 바닷길로 당을 향해 길을 떠났으나, 도중에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되돌아오고 말았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일어난다. 신라에 없는 진리가 당에 간들 있겠으며 당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없겠는가?”하고 당에의 구법유학을 포기한 원효는 국내에서 더욱 불교문화 증진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는 불교의 참뜻을 올바르게 드러내어 알리기 위하여 지금까지 깊이 연구한 모든 불전의 주소(註疏) 및 많은 저술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그 질과 양에 있어서 인간의 힘으로는 상상도 못할 초인적인 저술을 해서 불교문화뿐 아니라 민족 문화사상에 유례가 없는 업적을 남겨 놓았다.
그의 중심사상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저술은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이라고 할 것이며, 그의 저술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역작은 각승(角乘)이라고도 불리었고, 또 저술강설(著述講說)의 연기설화(緣起說話))까지도 남기고 있는 『금강삼매경소[金剛三昧經疏(論)]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의상
진평왕 47년(625)에 태어난 의상(義湘)은 원효와 같은 시대의 고승이다. 경주 황복사(皇福寺)에서 승려가 된 그는 8세 위인 원효와 함께 두 번이나 당나라 유학길에 나섰다. 첫 번째 길엔 실패하고 두 번째는 문무왕 1년(661)에 원효가 중도에서 되돌아갔으므로 혼자서 바닷길로 당나라에 갔다. 거기서 교학을 연구하여 스승의 찬탄을 받고 이름을 떨친 그는 스승이 돌아간 후 그 뒤를 이어 강학을 지도하다가 문무왕 11년(671)에 귀국하였다. 그때 그는 당군이 신라를 쳐들어 갈 것이라는 정보를 듣고 급히 돌아와서 국가의 위기를 구하였다고 한다.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문무왕 16년(676)에 조정의 도움을 받아 태백산(太白山) 아래에 부석사(浮石寺)를 세웠다. 이 부석사 창건의 연기설화가 유명한 선묘용녀(善妙龍女)이야기다. 그는 여기서 배움을 찾는 제자와 일반백성들만 교화한 것이 아니고, 국왕까지도 감화를 받게하였다. 그를 존경한 왕이 장전(莊田)과 노복(奴僕)을 시주하였는데 그는 “우리 불법은 평등하여 종과 주인이 없으며, 또 재산이 필요없으므로 장전과 노복을 무엇에 쓰겠습니까?” 하고는 하나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의상은 또한 학식이 뛰어났다. 교학을 크게 일으켜 제자들을 가르치고 백성들을 교화하였다. 또 국가의 위급을 알리고, 국왕을 일깨워 백성들의 노역을 덜게 한 애민(愛民)의 고승으로서 오랜 전쟁을 겪어 피폐할대로 피폐한 국민들의 의지처가 되었으니, 그야말로 신라의 정신적 기둥이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또 낙산사(落山寺)에 신라관음신앙(觀音信仰)의 터전을 열었으며, 그의 교학으 ㄴ나중에 10대사원으로 크게 나뉘어서 성황을 보게 되었다.
의상에게는 저술이 그리 많지 않다. 모두 다섯가지 정도인데, 지금까지 전하는 것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와』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량發願文)』뿐이다.
2.불교교단의 변천
교단의 침체
30대 문무왕 때 통일을 이룩한 후 35대 경덕왕에 이르기 까지는 국가적으로도 전성기였지만 불교문화도 더할 수 없이 찬란했던 황금시대였었다. 특히 경뎍왕대를 불교문화의 최고 정정미아로 볼 수 있는데 36대 혜공왕(惠恭王)대를 지나면서 불교문화도 차츰 침쳬기로 접어들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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