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십자가를 등에 지고 일제 식민지 시대의 감리교회_735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15.06.27 / 2015.06.27
  • 10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8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본문내용
일제는 1905년 을사조약 후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으며, 1907년 고종을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을 체결하는 등 사법권, 관리 임명권, 한국 군대 해체 등의 권한을 독식하면서 식민 통치를 감행했다. 이때 해산된 군인들의 가담으로 일어난 의병항쟁은 일본군의 저항으로 실패하였으나, 1908년 재미 한인 단체 공립협회원이자 상항감리교회의 교인인 장인환은 한국의 독립자격 없음을 주장한 미외무부 고문 스티븐슨을 저격하였고, 1909년 가톨릭신자인 안중근은 이등박문을 사살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한일합방 공작은 급속히 진행되었고, 1910년 이완용과 데라우찌 사이에 한일합방조약이 조인되었다. 이는 일본의 완전 식민지로의 전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 한국 사회와 교회는 조용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선교사들이 이끄는 교회 전반의 일반적 양상
1) 체념어린 좌절감에서의 침묵-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조약의 충격은 컸으나, 정미 7조약 이후 이미 일본의 식민지나 마찬가지였기에 한일합방조약은 충격이 되지 못했다는 것.
2) 백만명구령운동의 영향- 이것은 망국의 충격을 흡수했던 1907년 대부흥운동과 비슷한 꼴이다. 1909년 개성에서 열린 남감리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기도 모임 이후 열렸던 “복음주의선교부통합공의회”에서 리드가 범개신교회의 전도표어로 “백만 명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로”를 채택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당시 개신교 총신도 약 20만, 선교사의 총수 약 200명) 당시 하루 날을 정해 완전히 전도에 바치는 ‘날연보’가 있었으며, 집마다 전도지와 쪽복음을 나눠주기도 했다. 목표 달성은 실패했으나, 전도의 열성이 한국 교회의 특성이 되었고, 전국 복음화를 위한 연합 정신이 고양되었으며, 차원 높은 영적 구원운동이 망국의 현실을 침묵 가운데 맞이하게 하였다.
엘리트층 교인들의 반응
1) 신민회- 부패한 사상과 습관을 혁신하고, 국민을 유신케 하며, 쇠퇴한 발육과 산업을 개량하여 사업을 유신케 하며, 국민이 통일 연합할 목적을 내 걸었던 신민회는 안창호에 의해 1907년 조직되었으며, 국권을 회복하고, 사회 혁신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상동교회 교인 또는 상동파 중심의 크리스찬 엘리트 구국운동단체였으며, 이후 서북지방 교회와 학교 교사 및 학생들로 확대되었다.
** 따라서 1907년은 선교사와 교회 중심의 신앙부흥운동 전개(개인의 심령구원운동 전통)와 신민회 중심의 사회구원의 전통이 세워졌던 의미 있는 해이다. 책은 교회의 침묵이 우선 역사적 변천에의 무관심이 아닌 백만명 구령운동으로의 대응이라 평가하고 있으며, 한편 신민회의 활동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구국운동이자, 민족 실력 양성 후 국권 회복 및 문명 국가 형성을 하고자 했던 성숙한 신앙운동으로 해석했다.
2. 105인 사건과 기독교 탄압
이는 반일 민족세력의 온상으로 부각되었던 학국 교회를 제거하는 작업 중의 일환이었다. 한국 통치의 걸림돌이자, 한일합방 때 침묵으로 일관한 기독교를 수상히 여긴 일본은 헌병사령관 아카시를 중심으로 1910년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옥관빈 등이 감리교인 임치정의 집에 모여 서북지방 시찰에 나선 총독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며, 배후에 선교사들의 사주가 있었다고 조작하였다. 1911년 일제는 각지의 지도자들과 학생들을 검거하였는데,(700여명) 이 때 학생들은 6월 YMCA 하령회에 참석했다는 이유로 잡혔으며, 이의 대회장이자 신민회장이었던 윤치호는 총독 암살음모 최고 책임자라 하여 1912년 체포되었다. 또한 당시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105인 가운데 94명이 기독교인이었다.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일제하 한국교회의 신앙연구 - 1920-30년대 이스라엘 역사 인식을 중심으로
  • 교회가 그 일에 포괄돼 있다는 반국체 비국민으로 그 불충을 시찰 탄압하려 했던 것이다. 민경배 “한국교회의 역사의식”그러나 발제자는 피식민지 교회의 해방신학과 같이 유태적 구약기독교의 해방적 신앙으로 일제하 한국교회를 단언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민족은 성서의 교훈이자, 역사적 민족(historic nation)이기 때문이다. 즉 일제하 한국교회는 ‘리얼리티와 역사를 가지고 실재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자신과 ‘유비적으로 인식’

  • [사회복지] 한국종교의 사회복지문제점과 과제fp
  • 일제 식민지 하에서의 민족의식과 민권의식을 갖게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 결과 구한말과 일제시대에는 교회가 계몽운동과 애국운동에 적극 관여함으로써 사회운동 차원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일제 식민통치기간 중에는 농촌 개발사업, 농민 계몽사업들이 선교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는데, 농사전문지, 농사학교, 농사강습회, 신용협동조합운동 등을 통하여 선교과제를 실천하였다. 해방 후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는 정부수립 및 한국전쟁으로 인

  • [기독교교육]기독교교육의 목적,역사, 기독교교육의 동향, 기독교교육의 여성관,전인적 발달, 기독교교육의 교사 역할 분석
  • 민족지도자들이 세계와의 접촉과 함께 기독교교육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2. 민족교회의 탄압과 민족교육의 수난(1910~1919)1) 시대적 특징일본은 1910년 8월 29일 합병조약을 선포하고, 한국 민족을 철저히 일본화 함으로써 영구히 우리 겨레를 말살하려는데 그 목표가 있었다.이러한 정책을 수해하기 위한 표어 - 황신민화, 내선일체(內鮮一體), 일시동인, 공존공영 등 식민지라는 말 대신 신지(新地)라고 부르기도 한다.2) 일제의 학교교육 탄압

  • [종교학]기독교와 타종교(교파)
  • 등장하게 되었다. 장로제 운영을 택한 장로교, 감독제 운영을 택한 감리교, 회중들 중심의 운영을 택한 회중교회, 일체의 인위적 운영을 부정하는 무교회파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3) 한국의 교파 분열한국 개신교회의 분열은 전부 해방 이후에 일어나게 되었다. 일제 시대에는 일본의 억압과 박해로 분열 할 틈이 없었지만, 해방 이후에 일제 시대동안 박해를 받아왔던 교회를 정리하면서 교회 분열의 문제가 하나둘씩 대두 되었다. 물론 일제에게

  • [종교사회학] 종교가 사회운동에 미치는 역동성에 대한 연구
  • 민족운동, 일제의 식민지 시대에는 독립운동의 중심에도 서게 되었던 것이다. 독립신문의 발간, 독립협회의 활동, 3․1운동에의 많은 기독교인 참여와 33인의 민족대표 가운데 기독교인만 16명이라는 사실 등이 그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 시기의 기독교는 뛰어난 사회변동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민중계층은 기독교를 단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박탈감으로부터의 보상, 고통으로부터의 위로라는 동기에서 받아들이게 되므로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 최근 판매 자료
    저작권 관련 사항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레포트샵은 보증하지 아니하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됩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