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국가 완성의 과정 율령반포와 중앙집권체제의 확립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15.03.29 / 2015.03.29
  • 4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6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본문내용
고대 국가 완성의 과정
-율령반포와 중앙집권체제의 확립
- 들어가며...
우리나라 각지에 성장한 정치세력 가운데 초기국가를 형성하는 데 성공한 것은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였다. 옥저의 중심세력인 옥저현후(沃沮縣侯)나 동예 불내현후국(不耐縣侯國), 그리고 삼한의 목지국과 구야국은 국가형태로 발전하지 못한 채 소멸하고 말았다. 그러나 초기국가를 이룬 이들 여러 나라도 모두 순조롭게 발전을 거듭한 것은 아니었다. 고조선은 한의 침략으로 멸망하였고, 부여는 인접한 고구려에 병합됨으로써 마침내 고구려 백제 신라만 남아 고대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의 중앙집권체제 확립 과정
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고구려의 발전
B.C. 1세기경 초기국가를 이룩한 고구려는 그 후 더욱 발전하여 A.D. 1세기 후엽에 이르면 고대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 때 고구려는 밖으로 부여 및 중국세력과 끊임없이 대립하는 가운데 영토의 확장을 도모하고 안으로는 국가체제의 정비를 이룩하였던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B.C. 6년(琉璃王 14)에 부여왕 대소(帶素)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질자(質子)를 요구하였으나, 고구려가 이를 거부하자 군사 5만을 이끌고 쳐들어 왔다가 헛되어 되돌아갔으며, A.D. 13년(유리왕 32)에도 부여군이 침입하였지만 왕자 무휼(撫恤)의 요격으로 섬멸되었다고 한다. 金龍善, <高句麗琉璃王考>《歷史學報》87, 1980.
그러나 고구려가 정복사업을 보다 활발히 하고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고대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A.D.1세기 후엽인 태조왕(53~146) 때였다. 태조왕은 지금까지 중국과 충돌하면서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영토확장을 꾀하였다. 우선 태조왕 4년(56)에는 옥저를 복속시켜 함흥지방을 확보하였고, 2세기에 들어서는 요동진출을 도모하였다. 이리하여 왕 53년(105)에는 요동을 공격하여 여섯 현을 탈취하였고, 왕 69년(121)에는 현도군과 요동군을 공격하여 요동태수를 죽이고 2000여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으며, 이 해 말부터 이듬해에 걸쳐 왕이 스스로 1만 여기(騎)를 거느리고 현도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부여군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요동진출은 그 후 차대왕(146~165) 신대왕(165~179) 때에도 계속되었으며 신대왕 8년(172)에는 한의 대군이 쳐들어오자 굳게 성을 지키다가, 퇴각하는 적군을 좌원(座原)에서 섬멸하였다.
태조왕 대에는 이와 같은 대외적 발전과 함께 대내적으로는 국가체제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이 때 계루부 고씨(高氏)의 왕위계승권이 확립되어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 집권적인 관료체제가 마련되기 시작하였다. 태조왕대가 고구려의 대내외적 발전의 일대 전환기였음은 그의 칭호가 시조격인 태조왕 또는 국조왕(國祖王)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국가체제의 정비는 그 후 보다 진전되었다. 신대왕 다음의 고국천왕(179~197) 때에는 부족적인 전통을 가졌던 5부가 방위를 표시하는 행정적인 5부로 개편되었다. 즉, 종래의 족제적인 계루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소노부가 각각 행정적인 내부(黃部) 북부(後部) 동부(左部) 남부(前部) 서부(右部)로 바뀌었으니, <위지> 동이전 고구려전에는 5족명만이 보이는데, 《후한서》동이전 고구려전의 唐章懷太子註에는 방위로 표시된 5부의 별칭이 나타나 있다.
이것은 연장자를 족장으로 뽑던 종래의 유제를 정산한 것으로서 역시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구족장 세력이 아닌 을파소(乙巴素)를 국상으로 기용한 것이나 관곡을 대여하는 진대법을 실시한 것 등도 이 때 고구려가 강력한 중앙집권정치를 시행하였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한국고대사] 삼국의 신분구조
  • 중앙에서는 골족을 제외하고 보면, 과거 거수의 후예들과 호민(豪民)의 범주에 드는 하급지배층의 신분을 설정해야 했다. 이들은 당연히 당시의 지배신분, 즉 우두머리들이었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존재하던 6등급의 두품(頭品)이란 외피가 자연스럽게 이들에게 재설정 되었다고 여겨진다. 이제 국가 체제 내 지배자(頭) 신분으로 드러나고 있는 보다 복합적(複合的)인 지배층에 대하여 전부터 존재한 두품제가 적용되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의

  • [불교][고구려][고구려시대][백제][백제시대][신라시대]고구려(고구려시대)의 불교, 백제(백제시대)의 불교, 신라(신라시대)의 불교, 통일신라(통일신라시대)의 불교, 고려(고려시대)의 불교, 당(당나라)의 불교
  • 통합적인 종파의 출현이 두드러진 시기였다.참고문헌김복순(2005), 신라 불교의 연구현황과 과제, 동국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김창식(1971), 고려불교에 대한 소고, 상주대학교강문호(2009), 당 전기의 불교정책과 유불도 선후론, 동국대학교사학회박광연(2010), 통일신라의 법화신앙과 불교 문화, 한국사연구회오경후(2011), 고구려 불교 : 격의불교, 국가 불교적 성격, 선학원조경철(2010), 백제 불교의 중국 영향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사상사학회

  • 고구려에 관한 고찰
  • 과정을 통하여 427년 평양천도 이 후에 재정비되었다. 관료의 등급은 대체로 12등급으로 분화발달되었는데 대대로(大對盧)태대형(太大兄)울절(鬱折)태대사자(太大使者)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대사자(大使者)소형(小兄)제형(諸兄)선인(仙人) 등으로 나뉘어졌다. ‘형’은 연장자로, 가부장적(家夫長的) 족장의 뜻을 나타내며 부족 연맹에서 고대 국가로 전환하면서 여러 족장 세력을 이러한 관등에 흡수한 것 같다. ‘사자’가 붙은 것은 씨

  • 고구려의 통치체제
  • -고구려의 통치체제- 과목 : 한국 고대국가의 성립과 발전발표일 : 11월 5일 금요일발표자 :목차 1. 5부체제의 성립과 운영(1)5부체제의 성립(2)5부체제의 확립(3)5부체제의 운영2.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정비(1)중앙집권력의 강화(2)율령의 반포와 국가체제의 정비3. 왕권의 쇠퇴와 정치운영체제 4. 통치조직의 정비(1)중앙통치조직(2)왕도 및 지방통치 조직(3)군사조직의 정비고구려의 통치체제1. 5부 체제의 성립과 운영(1) 5부체제의 성립-압록

  • [동양사] 당전기의 지배층- 관중집단과 산동귀족 중심으로
  • 율령체제가 현실에서 괴리되어 누적된 여러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바로 개원의 치 였으며, 여기에서 활동한 자들은 대부분 무위후조에 진출한 신흥과거관료였다.중국을 항구적 관료제사회 로 보는 관료제의 기점을 흔히 송대 문신관료제 의 확립에서 구하고 있으나, 엄격한 사서의 구별에 기초를 둔 귀족제적 율령관제가 실질적으로 붕괴되고, 광범위한 관료층의 기반이 형성되어 황제의 전제독재가 강화되는 관료제의 기반은 당초 이래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 저작권 관련 사항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레포트샵은 보증하지 아니하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됩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