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 시기 역사학의 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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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문화대혁명 시기 역사학의 궤적-
1. 문화대혁명 우리에게 무엇인가?
1976년 마우쩌둥이 사망한 이후 특히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中全會)가 마우쩌둥의 “원화따거밍”을 부정하고 덩샤오핑 주도로 개혁개방 노선을 추구하게 되자, 중국 바깥에서 자신의 대의와 중국 사회주의혁명의 이상주의 노선을 동일시하고 있던 많은 지식인들은 신념의 공황에 빠졌었다. 더욱이 1976년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를 계기로 사상해방과 실사구시 노선에 따라 개혁개방의 정책을 시행하면서 문혁은 오랫동안 필자의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1970년대 말 이후 나도 모르게 형성된 마오찌 등 노선에 대한 필자의 비판적 시각도 중요한 원인이였다. 텐안먼사건을 일으킨 학생들의 민주화 노선에 동조하지 않았지만. 자오쯔양(趙자陽)이나 리수(려수, 1912-1988) 등이 상대적으로 급진적인 개혁노선을 지지하였다. 또 1922년 이후 적극적으로 장려한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1990년대 말부터 국가독점 자본주의의 성격을 보이고, 중국사회의 모순이 심화되는 것을 목도하면서, 1992년 한중수교 전후부터 필자가 맞닥뜨린 중국에 대한 정보의 홍수 역시 문혁에 대한 필자의 견해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1991년 1월 하순 베이징에서 열린 동양사학회 동계연토회에 참가하기 위해 처음 중국을 방문한 이래 필자는 거의 매년 한두 차례 개혁개방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고 이 모습을 확인해 왔다. 특히 2000년 8월부터 1년 동안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온몸으로 문화대혁명과 부대낀 사람들을 만나면서 문혁에다한 지식도 늘고, 인식도 바뀌었다. 또 문혁 시기에 출판된 다양한 형태의 자료들도 입수하게 되었다. 특히 2006년 10월 20일 함림대학교 아시아문화 연구소가 주최한 문혁 개시 40주년기념 심포지엄에 발효할 논문을 준비하면서 문혁 시기의 자료와 문혁에 관한 글을 비교적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검토할 수 이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다. 역시 필자의 문혁 인식에 중요한 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오늘날 많은 중국인들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소위 문화대혁명 십여년 동안 직접 그 현장에 있었고, 많은 것을 보았지만 아직도 말을 아끼고 있다. 1981년 6월 27일부터 29일까지 베이징에서 개최된 중국공산당11기 6중전회에서 심의하여 통과시킨 「건국 이래 당의 몇가지 역사문제에대한 결의(關于建國以來黨的若于歷史問題的決議)에 따르면 문혁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보편원리와 중국 혁명의 구체적 실천에 입각한 마오쩌둥 사상의 퀘도에서 이탈한 좌경착오를 범하여”. “국가와 인민에게 건국 이래 가장 엄중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주었다”고 하여, 문화대혁명 십여 년동안 마오쩌둥과 그의 추종 세력이 중곡사회에 가져온 변화의 의의에 대하여 전면적오로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이 새로이 공산당을 장악한 덩샤오핑 집단의 개혀과 개방 노선을 정당화하기 위한 공식적 견해에 불과하다. 1990년대 이후 서방 좌파 문화비평가의 문혁 평가가 중국학계에 영향을 미치고,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발전에 따라 중국사회의 빈부격차와 관료주의의 모순이 점차 심화됨으로써, 중국 내의 신좌파를 중심으로 문화대혁명의 평균주의에 대한 재평가의 움직임이 점차 표면화되고 있다. 물론 한국 학계의 문혁에 대한 평가 역시 최근 다양한 시각을 보이고 있다. 2006년 10월 20-21일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에서 열린 “문화대혁명 시기 학문과 예술” 심포지엄에서 발표자들은 대부분 문혁의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강조하였으나, 앞에 인용한 전인갑 교수는 “문혁은 비록 평균주의를 추구한 광포(狂暴)한 실험이었지만, 역사적 관성인 관료주의를 극복하고, ‘국가통치시스템과 엘리트 충원기제를 새롭게 재구성함으로써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앞당기려 했으면,’ 결과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사회 · 경제 · 영토상 통합을 강화시켰다”고 평가하고 있다.
필자 역시 문화대혁명 평가가 균형 잡힌 잣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는 전인갑의 견해에 동의하지만 관련된 문서(案)가 아직 충분히 공개되어있지 않고, 우리 학계의 독자적인 연구도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는 상황에서 문혁에 대한 평가는 더욱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더욱이 문화대혁명 연구는 중국 국내에서조차 1986년 이후에 비로소 학술적 연구단계에 접어들었고, 아직도 본격적인 역사연구의 대상에서 문화대혁명 시기는 제외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 미국과 일본의 경우도 문혁에 대한 연구가 많지만, 역시 역사학자의 연구는 여전히 그리 많지 않다.
요컨대 문화대혁명 시기에 대한 역사학 분야의 본격적인 연구는 이제막 출발점에 잇으며, 해외의 연구도 역사학 분야의 그것은 신뢰할 만한 성과가 그렇게 많지 않다, 따라서 국내 역사학계 역시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역사 연구를 위해 우선 사료와 연구 셩과를 충분히 확보하도록 노력한다면 국제적인 경쟁에서 그리 크게 뒤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대사 연구는 현실적 수요나 사료 확보의 제한 때문에 역사학의 여타 보조학문의 연구 성과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으면, 그 결과로 국적과 이해관계에 따라 지식의 체계가 달라진다. 우리 나름의 중곡문제에 대한 역사적 통찰과 우리국적의 지식 확보가 필요한 이유이다. 또한 모든 자료가 공개되고 연구성과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질 때까지 문화대혁명사에 대한 역사학계의 연구와 평가를 미룰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미국과 일본 학자들에게 선점되어 있던 문화대혁명 연구가 최근 중국학자들의 참여에 의하여 좀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중국 내부에서는 천동린(陳東林) 등 문혁세대가 중심이 되어 1985년부터 중국학자들 스스로 문화대혁명에 대한 기본지식을 정리한 『중국문화대혁명사전(中國文化大革命事典)』을 1997년 일본 후쿠오카에서 출판하였고, 미국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과 대만학자가 중심이 되어 1998년부터 정이한 전자판(CD) 자료집인 『중국문화대혁면문고(中國文化大革命文庫』가 1988년 처음 “중공당사교학참고자료(中共黨史敎學參考資料)” 14책 중 일부(25, 26, 27)로 내부발행으로 출판된 것은 중국과 미국 등에서 이루어진 문화대혁명 연구를 위한 사료정리의 새로운 성과이고, 최근 미국에서 축적된 문혁 관련 기반연구의 새로운 결실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2006년 문화대혁명 40주년을 맞이하여 로드릭 맥 파커의 개설서를 비롯하여, 그 동안 축적된 문혁의 연구 성과가 한꺼번에 출판되어 문혁연구의 환경이 크게 개선회도 있다.
하지만 이 글의 주요한 관심은 당시 문혁의 현장에 잇던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문화대혁명 시기 역사학의 특색을 살펴봄으로써 문화대혁명 시기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실마리를 제시해 보려는 것이다.
2. 문화대혁명 시기의 역사학 채방(採訪)
1) 혁명역사연구소는 존재하였는가?
역사연구소의 제1소와 제2소에서는 문혁이 시작되기 전부터 궈모뤄(郭若, 1892-1978)와 파원란(范文, 1893-1962)의 책임 아래 『중국사고(中國史稿)』와 『중국통사(中國通史)』편찬이 진행되고 잇었다고 했다. 또 1966년부터 1968년 3년 동안은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연구소도 제 기능을 못했지만, 당시 대표적인 역사편찬사업이었던 “24사(史)의 표점” 사업은 1966년 말부터 이듬해 1967년 초까지 일시 30대 초반의 젊은 학자 쑨다런의 책임 아래 진행되었으며, 천까오화 선생은 당시 중화서국에 가서 이 일에 참여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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