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중운동과 기독교사] 식민지 민족해방 계급해방 운동의 새로운 전환을 이룬 원산총파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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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민족해방·계급해방 운동의 새로운 전환을 이룬 원산총파업
1920년대 일제는 3·1운동 이후 강화되는 민족해방 역량을 분산·고립시키기 위해 자치·참정권, 물산장려운동, 생활개선운동 등을 전개하는 민족개량주의와 친일세력들을 보호·육성하는 이른바 문화정치를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농민의 생존권 탄압과 폭력적 지배 양상은 이러한 외피에도 불구하고 더욱 확대되어갔다. 20년대 후반 노동자의 임금 수준은 20년대 초반의 85%(일본인 노동자들의 절반 정도)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25년 치안유지법이 제정되고 29년에는 신치안유지법이 공포되면서, 이를 매개로 국내의 사회주의세력과 기층 노동자·민중운동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화되기 시작했다.
20년대 중·후반을 지나면서 단위 노동조합과 지방조직이 급격히 늘어났고 27년 지역노동조합연맹체(군단위)를 포괄하는 전국조직인 조선노동총동맹이 결성되었다. 많은 노동조합에서 8시간 노동제를 전면에 내거는 등 단위현장의 요구를 넘어 노동운동 내부의 연대성이 강화되고 있었다. 이 시기 노조운동은 일제의 수탈과 탄압이 점차 강화되는 조건에서 초기의 경제주의적 양상을 넘어 사회주의 운동과의 결합 속에서 계급적·정치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파업투쟁 양식도 이전의 자생적 투쟁의 한계를 넘어 보다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양상으로 이어지면서 일제와 자본가들에 맞선 공장점거와 연대파업의 흐름이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1929년 1월 14일부터 4월 초까지 전개된 원산총파업은 일제 식민지 하 노동운동의 가장 대표적인 투쟁으로 손꼽힌다. 당시 3개월 가량 진행된 파업투쟁은 단위사업장의 현안을 넘어 지역노동자의 단결된 파업으로 확대되고 전국적·국제적 연대행동으로까지 발전하면서, 일제하 노동자·민중의 민족해방, 계급투쟁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20년대 전반기 이래 원산지역에서는 크고 작은 파업이 계속 발생해 왔다.
당시 이러한 투쟁을 실질적으로 지도했던 원산노동연합회(아래 원산노련)는 21년 원산노동회로 출발, 25년 11월 세포단체를 직업별로 정비하여 개편된 조직이었다. 산하에 운송, 양화, 목공, 인쇄, 부두노조 등 8개 단위노조를 두었다(회원수는 1,591명). 원산노련은 조직의 강령으로 "노동운동의 통일과 무산자의 세계적 제휴를 도모하고 무산계급의 해방을 목표"로 하고 "교양에 노력, 노동자의 지식을 계발하고 당면 이익을 위해 투쟁하며, 정치적 또는 경제적으로 노동자의 생활을 향상시킨다"는 계급적 요구에 바탕을 둔 노동조합 조직을 표방하였다. 원산노련은 창립 이후 꾸준하게 지역 노동자들의 투쟁을 조직함과 동시에 노동자병원, 이발부, 소비조합 등을 매개로 한 일상적 복지사업을 전개하면서 지역노동자들에게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었다.
한편 1929년 1월 14일부터 촉발된 파업투쟁은 28년 9월 문평 라이징 선 석유회사(영국인 경영)에서 일본인 감독의 노동자 구타사건이 발단이 되어 발생했다. 당시 문평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으로 노조의 요구 조건들을 승인하고 일부 요구 조건(부상자에 대한 위자료 지불과 해고수당 지불 등)은 3개월을 보류하는 조건에서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3개월 후 회사측은 이를 뒤집는 작태를 저질렀다. 이에 격분한 문평석유회사 노동자들은 1월 14일을 기해 전면 파업투쟁에 돌입하게 되었고, 당시 파업투쟁을 준비하고 있던 원산 부두노동자들을 중심으로 8시간 노동제 실시, 단체계약 확립, 임금인상 등을 요구하며 지역의 노동자들이 속속 파업투쟁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1월 말 2월 초에는 원산지역 노동조합의 구심점인 원산노동연합회(아래 원산노련)의 지침으로 산하 노조가 동정파업에 돌입하면서 총파업 투쟁은 단사와 지역 현안을 넘어 전국적인 주요 이슈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총파업 돌입 결과 원산 일대의 공장과 모든 작업장들이 완전한 마비 상태가 되고 인근지역으로 연대투쟁이 확산되면서, 1월 말부터 조선총독부를 위시하여 경찰기관과 행정관서, 일본 자본가들과 어용단체들은 파업파괴·진압 공작을 본격화시키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의 최고 관리들을 위시한 함남도(함경남도) 상층 관리가 동원되고 일본 경찰이 앞장서 노조간부들의 구속·검거가 자행되기 시작했으며, 일본 자본가들은 원산상업회의소를 중심으로 노동운동의 구심점인 원산노련과 총파업을 파괴하기 위해 파업깨기꾼(파업파괴자)들을 모집하고 함남노동회 등 일제의 어용단체와 개량주의세력을 동원하여 파업파괴 공작을 노골화하였다.
이러한 일제와 자본가들의 계속되는 파업파괴 공작에도 불구하고 당시 파업노동자들은 규찰대를 조직하여 파업을 방어하면서 함흥, 청진 등 인근 지방들에 규찰대를 파견하여 연대투쟁과 자본가들의 대체노동력 모집을 저지하는 투쟁을 힘있게 전개하였다. 그리고 2월부터 원산총파업을 둘러싼 일제와 자본가들에 맞선 민중연대투쟁이 완강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당시 각지의 노동자들과 그 주변의 농민들, 청년학생들이 연대투쟁의 행렬에 속속 결합하였다. 각지의 동정파업과 파업기금이 모이고 농민들은 식량과 신탄을 공급하는 등 보다 단결된 투쟁이 이어졌고, 일본, 중국 등 국내의 외국노동자들, 해외 노동조합 등에서도 파업지지와 격려의 손길이 줄을 이었다. 총파업투쟁이 계속되면서 투쟁의 양상은 일제와 자본과의 물리적 충돌 양상으로 전환되면서 치열한 가두투쟁과 함께 정치적 성격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완강하고 지속적인 투쟁으로 이어진 원산총파업 투쟁은, 조직과 투쟁에서 헌신성을 보여주었던 지도부가 계속 검거되고 투쟁이 장기화되면서 전열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치안유지법을 무기로 원산노련에 대한 조직적 침탈을 강화하는 공세 속에서 새 집행부의 위원장 대리인 김태영은 일제와 원산상공회의소의 압력에 눌려 스스로 간부를 교체하고 강령을 노사협조주의로 개정하였다. 그리고 원산노련 간부의 단체협약권 포기와 전체 회원의 무조건 자유취업을 결정하면서 조합원들에게 복귀명령을 내려 파업투쟁의 대열은 크게 흔들리고 내부 분열은 확대되어 강고한 파업 투쟁력의 붕괴되기 시작했다. 당시 파업에 참여했던 많은 노동자들은 바뀐 지도부의 기회주의적 경향에 불복하면서, 일제와 자본가들에 맞서 힘찬 투쟁을 전개하였지만, 일제의 물리력과 투쟁지도부가 투항하는 조건에서 결국 4월 초 일본 경찰력에 의해 진압되면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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