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회사] 한국 실학사에서 서학연구의 위치-정약용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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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실학사에서 서학연구의 위치-정약용을 중심으로
17-18세기 조선 후기의 실학은 서학에 대한 부정 및 긍정 반응을 통해 서로 관련을 맺으며 발전하였다. 이 발제에서는 실학의 정치 사회적 배경과 실학의 연구사의 개요, 정약용의 정치사회 사상과 서학사상을 살펴봄으로써 실학에서의 서학연구의 위치를 확인하고자 한다.
1. 실학을 둘러싼 국내외 정치 사회적 배경
1850년 전후한 시기에 세계-한자 문화권은 서양의 경제적 종교적 침투와 함께 무력적 침탈을 전면적으로 받게 되었다. 내부적으로는 체제의 모순 이반 현상이 극에 달해서 금방 붕괴될 지경이었다. 중국 대륙이 혼란과 위기에 빠져들었거니와 한반도를 비룻한 일본 월남이 각각 비슷한 처지에 놓였다. 물론 왕조체제가 일정한 단계에 이르러 멸망하는 현상은 거의 주기적으로 일어났다. 종전과 달리 문명적 위기에 직면하였다. 한반도의 지식인들은 중국 대륙에서 아편전쟁(1840년)으로부터 영불연합군의 북경점령(1860)에 이르는 사태의 진전및 태평천국이 발흥했다가 좌절한 추이를 바라보게 된다. 결코 강건너 불구경이 될 수 없었다. 당장 이쪽에서도 서양 선박들이 근해에 빈번히 출몰하는가 하면 천주교도는 치성하고 농민반란은 격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영택, 실사구시의 학적 전통과 개화사상, 한중 실학사 연구:한국실학연구회, 민음사, 1998, 67-68.
1-1. 국내 정치적 사회적 배경
우리나라 실학은 서양 종교 쪽에서는 비판적이었으나 문학, 과학 쪽에서는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과학 기술에 대하여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무너져가는 낡은 사회체체 아래서 우리의 근대화를 위한 체계적인 연구를 해왔다. 그러나, 1801년을 고비로 실학이 떳떳한 활동을 거의 할 수 없게 되었다. 실학 활동의 기세가 꺾이게 된 몇가지 정치적 사건이 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1784년 북경의 한 천주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이 천주교종파로서 우리나라에 퍼지게 될 때에 우리의 전통적 이념과 체제에 큰 위협을 주게 될 만큼 천주교가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게 된 일이다. 다른 하나는 1791년에 전라도 진산 고을에 양반 출신인 윤지충과 그의 외종형인 권상연이 천주교 가르침을 따라 조상의 위폐를 없애고 부모 조상의 제사를 폐하는 일이 있었고, 이 일로 윤지충이 관청에 고발당하여 그해 12월에 극형을 받게 된 사건이다. 최동희, 서학에 대한 한국실학의 반응,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8, 48.
이 사건을 앞세우고서 노론 벽파가 천주교를 억누려는 거센 정치세력으로 발전하는 움직임을 보였으나 남인 시파와 가까이 지낸 정조 임금 때문에 잠잠해졌다. 그러나, 정조 임금의 서거 이듬해부터 순조 임금의 대왕대비 김씨의 섭정으로 시파가 득세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무서운 탄압령이 내려졌다. 이로써 남인 시파가 반역으로 내 몰리면서 이가환 이승훈 정약종 권철신을 비롯한 6명이 순교하였고 정약전과 정약용 형제는 귀향가게 되었으며 중국인 주문모 신부와 천주교 신자 300명이 목숨을 잃었게 되었다. Ibid., 48-49. 이 천주교 탄압사건을 신유사옥이라고 부른다.
이같은 무서운 탄압 속에서 1801년 9월에 황사영 백서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Ibid., 49. 황사영의 집에서 북경 천주교회에 보낼 편지가 비단에 쓰여져 발각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서양의 여러나라에 사정하여 우리 나라 천주교 세력을 일으킬 수 있는 재정적 도움을 주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2) 청나라 임금을 움직여 그 명령으로 우리 나라 정부가 천주교를 받아 들이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3) 청나라 임금이 그 아들에게 권한을 주어 우리 나라를 감독 보호하도록 해 달라는 것이다. (4) 서양의 해군 병력을 움직여 우리 정부를 겁주어 우리 나라에셔 천주교를 믿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진산 고을의 사건과 황사영 백서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서양의 종교 문화 과학을 포함한 서학에 대한 우리 사회의 오해와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결정적인 구실을 하게 되었고, 이같은 대중의 여론은 서학을 물리치려는 정치세력인 벽파에게 더 없이 좋은 구실을 주었다. Ibid.,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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