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김성수 경찰에 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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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해방전후사
<김성수,경찰>
김성수가 그동안의 삶에 대해 돌아보는 자서전형식
대내적으로는 세도 정치를 일삼는 부랑배들이 제대로 된 통치를 못하고, 삼정(전정, 군정, 환정)의 문란이 지속되고 있고, 대외적으로는 일본과 청나라의 간섭 외에도 미국,영국,프랑스 등의 침입으로 1860년에는 세계 최고로만 알고 있던 베이징의 천자가 서양의 코쟁이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등 서세동점의 위기가 가속되고 있던 혼란한 시기에...1891년(고종 28) 10월 11일 전라북도 고창에서 내가 태어났다. 집안 형편도 썩 좋진 않았을뿐더러 큰아버지가 아들이 없는 이유로 인해 난 아무것도 모른 채, 1894년, 아무것도 모르는 세 살의 나이로 큰아버지 김기중의 양자로 나가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집안에서 자란 큰 걱정 없이 자랐던 것 같다. 아버지(양부모)가 당시 고창군에서도 가장 큰 대지주이셨기 때문에 가진 땅을 다 소작 줘버리고, 항상 유흥에 빠져 사치를 일삼기도 하였다. 부모님은 당시로서는 고종 황제나 마실 수 있던 비싼 서양의 커피도 줄곧 마시셨고 부엌에선 각종 진귀한 향신료 냄새가 진동을 했던 것 같다.
6살(1897)이 되자 난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이 땐 그냥 이것만 하고 나면 신나게 놀 수 있다는 생각에 아무 의미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공부하였던 것 같다. 시간이 흘러 13살(1904)이 되자 점차 세상 물정에 깨어가기 시작하였다. 내가 살던 나라는 가난하고 힘이 없고 무기력한 그런 나라였다. 앞서 동양에서 가장 강하다는 청나라를 격파하고 잔뜩 기세가 오른 일본은 그동안 갈고 닦은 서양 무기 및 병법을 토대로 이젠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하게 된다. 한데,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지정학적으로 전장지가 한반도로 될 수 밖에 없는 것인지, 아니면 힘없는 약소국가에서는 싸워도 괜찮다는 양국 간의 합의 때문인지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쟁을 치른다. 많은 사람들이 죄없이 다치고, 집을 잃고 가축을 잃게 되고, 방화 약탈 강간이 난무했다. 그 와중에도 일면 다행히 우리 가족이나 집은 큰 피해를 보지 않았는데, 이는 아무래도 아버지께서 가진 넓은 땅 중 일부를 일본 군대의 기지 및 막사를 짓는데 쓰일 땅으로 헌납했기 때문인 것 같다.
19살(1910) 성인이 되어 대학을 가야했다. 하지만 조선에는 아직 민립대학설립운동이 벌어지기도 전이라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곳이 전무했다. 그리하여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 수밖에 없었는데 이 때 나의 평생지기 ‘송진우’ , ‘백관우’ 등과 교류하였다. 비록 나라가 일본에 넘어 갔고 일제에 의해 수탈당하는 우리 나라 사람들을 생각하면 차마 할 수 없는 짓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그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들을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었으며, 사실 서양의 각종 문물을 빨리 수용한 일본만큼 좋은 유학지를 찾기는 힘들었다고 생각했다. 대학을 졸업하기 직전 잠시 다시 한국에 들러 집으로 왔다. 부모님께서는 나에게 동양에서 가장 선진화된 일본에서 지식을 갈고 닦아 왔으면 니 지식을 쓸 곳을 찾아야 할것이 아니냐고 물으셨다. 물론 아버지 앞에서는 “예, 그래야죠.” 하고 대답을 했고, 당초 목적은 적을 알고 나를 알기 위함이었지만, 사실 내가 일본에 가서 느끼고 온 것은 일본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경외감이나 존경 및 부러움 이 정도였지... 당초 나의 계획과 부모님의 바람과는 달리 학문의 높은 경지에 이르진 못했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이 어딜 가서든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당당한, 지위가 높은 아들이 되어야 했고, 나는 중앙학교 교장이라는 감투를 쓰게 되었다. 감투를 얻어 쓴 것 까지는 좋은데, 이제 부모님은 나이가 많이 드셨고 성인이 된 나는 내가 돈을 벌 방법을 궁리해야 했다. 학교 교장이 되면서 사회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고, 민족 교육을 위해 헌신한다는 신문 기사도 나가는 등 돈이 아닌 명예가 주는 쏠쏠함에 대해서 알아가기 시작한 것도 이때 쯤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즉, 돈을 벌더라도 사채와 같은 비도덕적이고 경시받는 직업보다는 남들에게 명예도 거둘 수 있는 그런 직업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학교 교장도 물론 하나의 직업이긴 하지만, 현재 우리 집안에 있는 막대한 재산을 굴리고 운영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미약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결국, 일단 아버님께 자본금을 꾸어 와서 27살(1919년)에 경성방직회사를 설립하여 경제 자립과 민족 자본 육성을 위한답시고 대대적인 홍보를 하
<경성방직회사>
<< 인촌 김성수의 생가>>
였다. 물론, 이러한 일을 하면 다른 사람 같았으면 일제 당국의 눈치를 보고, 고초를 겪었겠지만, 이미 일제에 협력하는 권력자의 대부분이 우리 아버지와 친하거나 포섭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나의 꿈의 실현에 큰 장애물은 없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때는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을 둘러싼 상권 경쟁이 청일전쟁이 지난 뒤 대략 20년이 가까이 흘러 일본의 상권 독점이 가속된 시기라서 어떤 제품도 싼 제품이 없었다. 이러한 일본의 독점 체계에 더하여 질 좋은 제품은 일본으로 팔려나가 버리는 상황에서 질좋은 무명 한 필이나 쌀 한 가마니를 사려면 왠만한 집 한 채 값도 맞먹는다. 이때, 내가 방직회사를 세워서 우리 민족을 위해 조금씩 싸게 팔기는 하였지만, 사실 매우 큰 수익이 남는 꽤나 짭짤한 소득원이었다. 한 해 성공적으로 방직 사업을 마치자, 아버지는 매우 흡족해 하셨다. 이젠 마음 편히 눈을 감아도 걱정이 없겠다시면서... 하지만 돈은 사람으로 하여금 더욱 이기적인 동물로 만든다고 하였던가... 점차 내 마음속 내재된 이기심이, 나를 어떻게 보면 사악하게 느껴진다고 할 만큼 계산적으로 변해갔다. 사실 우리 나라가 국권을 빼앗기고 나서부터 우리 사회는 너무 빠르다고 느낄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변해갔다. 교통,우편(통신)제도가 꽤 많이 확충되었고 서양식 병원이나 학교나 건축물 등도 생겨났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건데 우리의 눈과 귀가 되어줄 언론은 아직도 구세대의 악습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막연한 어조로 일제를 무찔러야 한다는 식의 구호만 외치고 있을 뿐, 구체적인 실천 방안에 대해서는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 마저도 1911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대한매일신보 이후로 수그러들고 있다. 우리 2천만 조선인민들은 그저 하루하루 끼니를 이어가며 ‘살기 위해 살아간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억압되어 살아가고 있다. 문화생활이나 서구의 근대적 문명을 맛볼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의 특권층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나도 그 특권층에 편입되어 살고 있지만 뭔가 꺼림칙하다. 나는 이렇게 미개한 조선인들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뭔가 힘이 되어 주고 싶은데 말이다... 그래서 생각한 게 신문사를 만들면 어떨까 한다. 우리나라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민중들을 계몽할 수 있는, 그러면서도 타산에 맞는 그런 신문사를 세우고 싶었다. 일단 아버지께 계획을 말씀드리니 아주 훌륭한 계획이라면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하신다. 일단 신문사를 세우겠다는 공고를 내니 많은 사람들이 도전 해보겠다며 지원했다. 나는 조선은 죽은, 바보들의 나라인 줄만 알았더니 생각보다 많은 인재들이 미국이나 독일과 같은 선진국에서 공부한 경력이 있고, 가까운 일본으로 유학갔던 학생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또한 과거 일제에 대한 강한 논조로 인해 강제 폐지가 되었던 제국신문이나 황성신문, 만세보 등을 통해 기사 작성을 해본 사람들도 많았다. 이처럼 모두 경력이 화려한 만큼, 고민도 될 법했으나 나는 직접 면접을 보아 진정 조선 민중에 대해 깨우칠 수 있는, 패기가 있는 사람들을 20여명 뽑았다. 그리고 영국에서 만든 최신식 윤전기도 일본을 통해 들여왔다. 동양의 최고 신문이 되기 바라는 마음에서 동아(東亞)일보라고 신문 이름을 정하고 1922년 4월1일 첫 발간을 시작했다. 민중들은 그동안 폐허, 백조와 같은 비정상적이고 기괴한 말들만 늘어놓는 문학지만 보다가 지방 구석 구석, 심지어는 세계 각국의 정세를 알리고 지식을 주는 제대로 된 신문이 탄생했다는 것에 기뻐하는 것 같았다. 또한 당초 계획 중 하나였던 이윤 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하여 조선 물산 장려운동을 펼쳤다. 그 결과 내가 운영하는 방직회사의 수입은 천문학적으로 뛰었다. 왜냐하면 몽매한 조선인들, 감정적인 조선인들은 오직 ‘우리 민족’ 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품질도 보지 않고 무조건 우리 물건을 사들여 버렸기 때문이다. 몇 년 전과는 상황도 달라, 이제는 일본을 통해 수입되는 면도 영국이 아닌 일본에서 직접 기계를 가동하여 생산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가격 면에서는 우리와 경쟁이 안될 정도로 헐값에 들어왔다. 하지만 민중은 우리 것을 사 입어줬다. 고맙긴 했지만 우리 상품은 가격이 지속적으로 올랐다. 증가시킬 수 있는 생산량은 한정적인데 수요는 폭발적인 증가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에 대해 나를 욕하기도 하고 우리 회사에 반대하는 시위가 생겨나기도 했는데 나는 무지 몽매한 조선인들을 탓할 수 밖에 없다.
시간이 흘러...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킬 때쯤을 회상해본다.
나는 무얼했던가..
당시 일본은 거칠 것이 없었다. 이미 동양내의 유일한 근대국가라고 지칭하며 자신들을 스스로 문명인이라 칭하며 우리 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권역을 대부분 정벌하였고 그 오만함의 소산으로 오사카에서 열린 엑스포에서는 한국인,중국인,대만인 등을 미개인 표본으로 실제 직접 전시까지 하려했다는 말도 돌기도 하였다. 살짝 울컥하기도 하였지만 우리는 현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이미 일본은 만주에 괴뢰정부를 세워 중국에 도발하고 있지만, 이빨빠진 호랑이 중국은 뚜렷한 대응책 없이 당하고만 있다. 내가 잘 아는 일본관리의 말에 의하면 조만간 일본은 세계재패의 야욕을 다시금 불태우기 위해 중국 , 미국 등의 강대국과 직접 겨룰 예정이라고 한다. 물론 전쟁에 동원되는 이들은 힘센 조선인, 대만인 등이 주를 이룰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얼른 만주사변이 일어난 직후 32년, 내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보냈다. 이미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징병되는 이들의 참상을 알기에 내 아들만은 그런꼴을 안봤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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