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회사]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개신교회와 반유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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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개신교회와 반유대주의
1. 들어가며
우리가 흔히 “유대인”이라는 민족을 생각할 때, “유일신인 하나님만을 믿는 민족”, “전 세계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사는 민족”, “탈무드” 그리고 “돈을 잘 버는 민족”을 떠올린다. 특히, 우리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을 생각할 때는 “구약의 하나님만을 믿고” 기독교에서 믿는 “예수그리스도의 존재를 아직도 인정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사람들”로서 인식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사람들”로서 기억한다는 것은 내면에 이미 “반유대주의” 사상이 깔려 있는 것일 수 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 “반유대주의” 사상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세계 곳곳 특히 기독교 국가에서 많은 핍박과 박해를 받아왔다. 그리고 이러한 반유대주의적인 증오심은 “유대인 학살”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기독교 신앙 내면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반유대주의” 사상을 이번 발제테마로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특히, 기독교 문화의 중심지인 유럽에 거주하게 된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중심으로 반유대주의 사상을 살펴보고 현대사의 가장 참혹한 비극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유태인 대학살”의 근거를 찾아보고자 한다.
2. 유럽의 디아스포라 유대인과 반유대주의 사상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유럽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때는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us)가 예루살렘을 식민지로 만들었던 131년에서 135년 사이부터다. 이때, 중부와 동부유럽으로 쫓기어 온 유대인들을 “아시케나이짐(Aschkenaisim)”이라 했고, 북아프리카를 거쳐 이베리아반도 스페인으로 들어온 유대인들을 “세파르딤(Sephardim)"이라고 한다.
유럽에 거주하게 된 유대인들은 유럽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영향을 끼친 만큼 각 나라에서 유대인을 박해하는 사건 또한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박해 원인은 종교(유일신관)와 경제(고리대금업), 인종적(선민사상)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오한진, 『유럽문화 속의 독일인과 유대인, 그 비극적 이중주』, 서울 2006, p.5.
2.1. “예수의 살해자”, “악마의 후손들”인 유대인
유대인들은 대부분 이교도들 틈에 섞여 살면서도 그들의 신앙인 “유일신관”은 버리지 않았다. 기독교가 퍼져있던 유럽에서, 이러한 유대인들의 유일신 신앙은 당연히 유럽의 교회들과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교회의 교부들은 유대인들이 신약을 거부하고 오직 구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는 것에 대해 비난하며 나아가 기독교 신앙의 뿌리가 유대교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자 애썼다. 이러한 “반유대주의”사상은 주로 13세기와 14세기 초엽에 도미니크교단의 탁발수도사들의 활동(일반서민들에게 설교하는 가운데 대중들에게 영향력을 끼침)에 의해 급속히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고 유럽의 기독교문화에 뿌리 깊게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러한 유대인의 비난정서는 민간에 유대인에 대한 비이성적인 미신(페스트 전염에 죄과 부여)과 결부되어 나돌기 시작했고, 많은 문학작품에 반유대적인 정서를 표현했으며, 이러한 유대인을 "신의 살해자"(마 27:25,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또는 "악마의 후손들"(요 8:37-47,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로 비방하며 박해를 가했다 오한진, p.5;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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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유대인의 배금주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돈”은 그들의 “신앙”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많은 박해를 받는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돈”을 벌었고, 유럽으로 이동한 유대인들은 궁중귀족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그들에게 돈을 헌납하며 재정을 보조함으로써 실제로 영주나 귀족들에게 특혜를 받기도 했고 국가 재정에 많은 기여를 했다. 특히, 당시 유대인들은 고리대금업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였는데, 이들의 투기적 경쟁 때문에 위협을 받았던 기독교인 상인들이나 유대인들에게 빚을 지고 있던 농민들에 의해 반유대적인 감정은 확산되었다. 오한진,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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