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회화에 있어 서양화법의 영향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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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론

제1장 조선후기 시대상과 새로운 화풍

제2장 서양화법의 유입과 전개
A. 천주교화의 전래
B. 부연사행원의 서양화법 유입

제3장 조선후기 회화작품에 나타난 서양화풍 연구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영 정조대에 오면 남종화는 이미 한 풍조로서 하나의 격식이 되었고 일부의 산수화 작가들은 전통적 화론에서 탈피하여 실경에서 얻어진 구체적인 인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원근법, 명암법 등을 시도했으며 종래의 산수화에서는 여백으로 남기던 하늘에 청색을 칠해 실재감을 더하기도 했다.
진경산수화의 본격적인 유행은 정선에 의해 이루어졌다. 정선이 우리나라의 실경을 소재로 삼아 그린 것은 작가개인의 자질과 독창성은 물론이며, 당시 사회의 실학사상에서 기인한 것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외에도 이 시기의 새로운 회화경향 가운데 하나는 풍속화의 유행이다. 이는 서민들에게도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남으로써 그림의 소재와 대상이 이들 수요층의 요구를 따르게 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지며, 서학의 유입에 따른 평등의식과 박애정신이 사상적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본격적인 풍속화는 김홍도, 신윤복에 의해 그려졌는데, 정선이 그의 진경산수화에 중국이 아닌 우리나라의 산천을 소재로 삼았듯이 김홍도는 그의 풍속화에서 조선 후기 서민사회의 모습을 다루어 농민이나 수공업자들의 생활 단면을 소재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한편 신윤복은 남녀간의 애정을 즐겨 그렸으며 나들이 정경 등 당시 사회의 적나라한 모습을 독특한 필치로 그렸다. 이러듯 풍속화는 실제 생활 주변의 소재를 중심으로 하여 현실감이 강하고 일반과 가까워지려는 경향이 짙었다.
이러한 진경산수화와 풍속화의 유행은 현실적 소재의 객관적 표현을 위하여, 눈을 통해 확인하고 확인된 사물을 선입견에 의한 변질 또는 왜곡 없이 묘사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무렵 중국으로부터 서양기법의 전래는 더욱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묘사를 추구하게 하여 근대적 성격의 회화가 정립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화가들이 주체적 입장을 가지고 자신의 시각으로 조선이라는 상황이라는 점을 인식하여 서양화의 기법을 수용하였기에 조선후기의 회화는 전통회화를 새롭게 전개 시켜 나가는 단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은 중국으로부터 서양화기법을 유입할 수 있게 한 밑거름이 된 동시에 한국회화를 근대적 성격의 회화로 발전시킨 사상적 바탕이 되었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후기 회화의 경향은 이러한 당대의 새롭게 변화하는 사회사상과 함께 민족적 자아의식을 바탕으로 현실과 대중과 보다 가까워지고 사실성이 강해지면서 격식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다고 요약할 수 있겠다.










제2장 서양화법의 유입과 전개

조선은 동북으로 치우친 지리적 환경으로 유럽 열강의 항행권 안에 들지 못해 오랫동안 유럽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1653년에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서 표류하다가 억류되었는데 환국 후에 표류기를 저술하여 조선을 유럽각국에 소개하였으나 당시에는 서구 각국의 관심이 조선에까지 미치지 않았다. 또 당시 백성들의 해상활동을 금해 서양인과 직접 마주칠 기회는 전혀 없었고 따라서 조선의 근대화는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더뎌질 수 밖에 없었다. 뒤늦게 실학사상의 배경 하에 서양문물이 수용되었고 더불어 서양화법도 유입되어 조선 화단에 번지기 시작하였다.

A. 천주교화의 전래
대개 종교가 타민족에게 전파될 때 그 종교가 수반해 가져온 문화적인 요소가 종교전달의 교량적 역할을 한다. 청나라를 통해 서양문물과 천주교가 전래되면서 조선후기의 사회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1715년에 북경에 도착한 이탈리아의 선교사 Castiglione는 청의 궁정에서 활동했는데 그는 유능한 화가로써 중국화의 표현기법과 서양의 화법을 절충한 그림을 그려 청 왕궁에서 환영 받게 되었다. 그는 초상화, 궁정의 말들을 그린 두루마리 그림들을 남겼으며 수많은 제자들과 추종자들도 생겼다. 이렇듯 청의 궁정을 중심으로 서양화풍이 유행하고 있을 시기에 조선의 외교사절은 시대 추이에 따라 서양문물을 조선에 소개하고 동시에 서양화를 유입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의 이승훈이 북경에 가게 되었을 때(1783) 종교실천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던 이벽의 간곡한 부탁으로 북경의 그라몽 신부로부터 입교절차를 받고 천주실의 십자가 성화 등을 받아와서 이벽에게 넘겨주었다.(1784) 이벽은 곧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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