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근현대민중사] 의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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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 의
1 개항기
①서양복 수용과 의제 개혁
②의제개혁과 단발령의 반발
③민간의생활의 변화 - 개화의 신제품: 조끼와 두루마기의 보급
④여성 한복 개량
⑤민간 의생활의 서양화
⑥옥양목의 보급
2 일제 강점기
①남학생 교복
②여학생 교복
③의복개량
④백의 폐지, 색의 장려
⑤모던걸 신여성: 식민지 근대의 이중성(1820-30년대)
⑥전시체제: 몸뻬와 국민복(40년대)
3 해방후
①구호물자와 밀수품의 범람 (40-50년대)
4 산업화시대-서양복의 일상복화와 한복의 퇴조(60-70년대)
①재건복
②서양복의 일상복화
③개량한복과 한복의 퇴조
④패션경향
5 탈유행과 세계화 시대(80-2000년대)

II 식
1 전근대의 식생활
2 개화기의 식생활
3 일제강점기의 식생활
4 광복 이후 1960년대까지의 식생활
5 경제발전기의 식생활(1967~)


III 주
1 외세와 서양문화, 그리고 우리 백성들 : 구한말의 신기한 양식주택
2 식민지 시대의 강요된 질서와 반발 : 일제시대의 주택
3 전후복구를 위하여 : 5,60년대 재건주택 단지
4 1970년대 이후 주거생활 (현대의 고층 주상복합단지까지)
본문내용
④ 여성 한복 개량
이 시기의 여성한복 개량의 골자는 쓰개치마를 폐지하고 저고리 길이를 길게 하는 것이다. 근대식 여학교가 1886년 미국 선교사에 의해 이화학당을 필두로 1908년까지 전국 21개교가 세워졌다. 이러한 여성의 근대 교육으로 가치관이 변하되고 복식개량에 대한 요구가 대두하였다. 당시 여자저고리의 길이가 짧아 겨드랑이를 가리기 어려울 정도여서 여자 저고리 길이를 길게 정해 의복을 외출에 간편하고 검소하도록 개량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났다. 이런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여학교와 여성 단체에서는 저고리의 길이를 길게 하는 한편 통치마를 고안하였다. 조선시대 여성들은 내외법에 따라 얼굴을 가리는 쓰개치마(사대부)와 장옷(서민 여성)을 입었다. 당시 여학생이나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을 위하여 장옷을 폐지하자고 하는 논의가 활발했다. 그리하여 1908년 이화학당에서 쓰개치마가 사라지게 되었고 장옷 폐지의 대용물로서 양산이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얼굴을 내놓거나 우산으로 가리기는 시골이나 양반 사람에게는 1940년대까지도 용납 될 수 없는 행위였으며, 시골 양반 집에서는 혼례를 치른 새댁이 외출할 때는 반드시 입는 치마라도 뒤집어쓰고 나갔다.
⑤ 민간 의생활의 서양화
1900년에 관리들의 관복을 양복으로 바꾸고 일반인에게도 양복 착용을 정식으로 인정함으로써 양복이 일반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양복은 서울이나 도시의 관인이나 학생들 사이에서나 공복으로 사용되었으며 민간에서는 일부층을 제외하고 우리 옷을 준수하였다. 남성 의생활이 의제개혁을 통해 강압적인 변화가 나타난 반면 여성 의생활에서 양장화는 자발적이고 점진적으로 나타났다. 여성 양장은 해외에 나가 문물을 접한 신여성에 의해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궁중에서 양장을 제일 먼저 입은 것은 엄비였다. 엄비가 양장을 한 사진이 있는데 그녀가 1911년 사망하였으니 양장을 한 것은 그 이전으로 볼 수 있다.
⑥ 옥양목의 보급
개항 이후 양목이 수입되어 서민 옷감에 일대 변화가 나타났다. 기계로 대량생산되는 양목이 일본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수입되었다. 질이 좋고 대량으로 생산되는 양목이 들어오자, 옥 같은 서양옷감이라고 해서 옥양목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옥양목이 수입되자 경상도 전라도의 전통적 목화산업이 큰 충격을 받았다.

2 일제 강점기
일제시기에 들어서 점차 의생활은 한복과 양복의 이중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서양복이 들어온 지 30여년이 흘러 의복 개량 운동과 함게 서양복 입기가 많이 확산됨에 따라 양복이 차츰 보급되었으나 여자는 학생이나 일부 사회 활동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대부분 긴 저고리에 짧은 통치마를 한 한복차림이 많았다. 그 양상 속에서 우리 옷과 양복이 혼용되어 버선에 구두를 신기도 하고, 한복차림에 파나마 모자, 맥고모자, 중절모자를 쓰기도 했으며 한복에 망토나 오버코트를 입기도 하였다. 서양 내의의 사용도 증가하였으며 상투머리도 점점 사라져 40년대 이르러 거의 사라졌다. 20년경부터 고무신 사용하였으며 일부에선 서양식 단화를 신기도 하였다.

① 남학생 교복
남학생 교복은 우선 1910년대에는 보통 단발에 두루마기를 입었으며 15년경부터 바지, 저고리 위에 망토나 오버 코트 입는 학생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남학생 교복이 양복으로 정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② 여학생 교복
여학생 교복은 1907년 숙명여학교 양장 교복 처음으로 채택했지만 곧 폐지하였다. 1920년대 대부분 흰 저고리 또는 담색 저고
참고문헌
 고부자, 「우리 생활 100년 옷」, 서울: 현암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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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장섭, “서구화와 한국전통문화의 변동 2 - 의식주문화를 중심으로 -” 「한독사회과학논총 11」, 서울: 한독사회과학회, 2001
 이유경, 김진구. “우리나라 양복수용 과정의 복식변천에 대한 연구 - 문화전파이론을 중심으로 -” 「복식 26」, 서울: 한국복식학회, 1995
 안선경, 양숙희, “한국 근대 복식문화에 나타난 아메리카나이제이션 ( Americanization ) 에 관한 연구 - 1920 년대부터 1930 년대까지의 잡지를 중심으로” 「한국의류학회지 25」, 서울: 한국의류학회
 서울시정개발연구원 편집부, “서울 20세기 생활, 문화변천사”, 서울:서울시정개발연구원, 2002
 김광언, “우리생활 100년-집” , 현암사, 2001
 퍼시벌 로웰 “내 기억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 예담, 2001
 카트네프 외 4인, “내가 본 조선, 조선인”, 가야넷, 2003
 조선일보사, “사진으로 본 감격과 수난의 민족사”, 서울:조선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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