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화 -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와 비쉬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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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나치 점령하의 프랑스와 비쉬정권

가.비쉬정권의 성립

(1)프랑스의 패배와 비쉬정권의 수립

1938년 루드비히 벡크 독일 합참의장은 프랑스 군대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라고 경고한 바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프랑스 군대가 1940년 5월 10일 전쟁이 시작된 이래 6주만에 맥없이 무너졌다. 독일은 난공불락이라는 마지노선을 통과하여 단 몇주만에 피레네 산맥까지 닿을 수가 있게 되었다. 벨기에와 네들란드를 석권한 독일은 5월 15일 이미 전선을 돌파하였고 이어 한걸음에 파리를 향하여 남서쪽을 진격하였다. 영불해협의 북서쪽을 공격함으로써 프랑스군과 영국군을 함께 패퇴시키고 있었다.유럽 대륙에 남아 있던 연합군 34만명이 덩커크에서 철수함으로써 프랑스를 빠져나갔다. 6월 10일에는 이탈리아가 대프랑스 선전포고를 했고 프랑스 정부는 르와르 강 하류로 철퇴하였다.

마침내 6월 14일 밀물처럼 밀려든 히틀러의 군대가 아무런 저항도 없이 개선문과 샹젤리제 거리를 행진하고 있었다. 자유,평등,박애의 위대한 프랑스 정신을 담고 있는 이 상징적인 장소를 히틀러가 유린할 수 있었던 것은 자유 세계의 큰 충격이고 실망이었다. 다시 전세는 밀려 보르도까지 쫓겨온 프랑스 내각은 항복과 항전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영국과 미국으로부터의 지원은 기대하기도, 실효성을 가질 수도 없었다. 혼란이 극도로 고조되고 주요전력과 북부의 공업중심지가 상실된 마당에서 국내에서의 전의를 상실한 레이노 수상은 북아프리카로 거점을 옮겨 항전할 것을 제안하였다.페탕원수는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 땅을 떠나는 것에 극력 반대하였다. 또한 영국정부로부터는 '불영연합국'(Franco-British Union)의 창설 제의가 있었다. 이것은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운명을 강조하고 전쟁의 공동수행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그 제안은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사실상 전쟁은 끝나가고 있었고 프랑스 정부가 해외에 망명한 상태에서 영국의 전쟁 지원이 주목적인 '불영연합국'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회의감이 프랑스 정치지도자들을 지배하였기 때문에 이 제안은 거부되었다.

휴전파와 항전파의 논쟁이 치열하던 상황에서 1940년 6월 16일 당시의 레이노수상이 사임하고 대신 페탕원수가 취임하였다. 페탕은 패배를 인정하고 독일과의 휴전협상에 응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즉 1차세계대전 당시 베르덩 전투의 영웅이면서 당시 스페인 대사로 나가있다가 급거 귀국하여 부수상을 맡고 있던 페탕은 프랑스가 끝까지 싸워 완전한 몰락에 이르기 보다는 일부의 프랑스 군대라도 잔존하여 질서를 유지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당시 그는 프랑스가 제2의 폴란드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더군다나 영국도 꼭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또한 "정부가 휴전에 이르지 못하면 프랑스 군대는 명령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공포에 빠질 것이다.프랑스 본토의 포기는 적에게 프랑스를 넘겨주고 그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 되고 만다. 프랑스의 영혼은 프랑스에 남음으로써 유지될 수 있고 연합국의 대포와 함께 재정복함으로써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당시의 페탕에게는 "일단 우리가 프랑스를 떠나면 다시는 프랑스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유일한 결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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