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사] 진보신당을 통해 바라본 혁신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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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머리말

2. 진보당의 창당 배경

1) 호헌 동지회의 결성

2) 호헌동지회 내에서 ‘자유민주파’와 ‘민주대동파’의 분리

3. 진보당의 노선과 활동

1) 혁신정당의 창당

2) 당의 내부조직과 그 성격

3) 정책의 혁신성 ; 통일ㆍ경제ㆍ사회정책

4.진보당의 해체

1) ‘진보당 사건’의 전개

2) 조봉암의 죽음과 진보당의 와해

5. 맺음말


본문내용
2. 진보당의 창당 배경
1) 호헌 동지회의 결성
제 3대 국회에 들어와서 대한민국의 헌법은 이승만 대통령의 삼선문호를 개방기 위한 대통령 종신제와 국민투표제 및 대통령 중심제를 골자로 한 자유당의 개헌 작업이 이루어 졌다. 김운태, 1976 《한국현대정치사 제2권》, 성문각 104쪽 참고 이 개헌안에서는 ①내각책임제적 요소의 전면적 삭제에 의한 순수한 대통령 책임제 ②대통령 궐위시 부통령의 승계제 신설 ③사회국가적인 경제조항의 자유주의적 경제체제로의 이데올로기적 수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1954년 11월 27일 비밀 투표로 표결한 결과 개헌안 통과에 법정소요수인 재적 203석의 2/3정족수에 1표 부족한 135표의 찬성을 얻었다. 즉 개표 결과 재적203, 재적202, 가135,부60,기권 7표로 1표 차로 부결되고, 최순주 부의장이 부결을 공식으로 선언하였다. 그러나 29일 국회는 자유당의 억지 이론으로 통과된 동헌법을 정부로 이송하고 정부는 그날로 공포하여 효력을 발생케 하였다. 자유당은 재적2/3의 법정정족수는 수학적 계산방식으로는 135.333인데 0.333 즉 영점 이하의 숫자는 1인의 인간이 되지 못하므로 한 인격으로 취급할 수 없다 하여 四捨五入으로써 결국 203명의 2/3선은 135명이 타당하다는 논리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이것이 바로 사사오입 개헌이다.
사사오입 개헌 파동에서 총 퇴장한 야당측 의원들은 범야당 연합전선으로서 단결을 강화하고 대여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서 11월 29일 본회의장 퇴장 직후 ‘민의원 호헌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동구성체를 원내 교섭 단체로써 ‘호헌동지회’라는 이름으로 결집하였다. 이는 민주국민당. 무소속동지회등 반(反)자유당 세력으로 이들 60명이 결합하여 11월 30일 호헌동지회를 구성하고 이후 이를 기반으로 원내외의 범야당 세력을 규합하여 단일 야당 결성으로 지향하였다. 곧 호헌동지회는 신당운동으로 발전해 신당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신당은 반독재 민주세력의 규합을 창당지표로 하여 ①뚜렷한 공산주의자 ②독재정권에 깊이 가담한 세력의 두 그룹만을 배제한 세력의 규합운동이었다. 이 때 구체적으로 떠오른 그룹이 ①신익희ㆍ조병옥으로 대표되던 민주국민당계 ②장면으로 대표되던 자유당 이탈파와 흥사단계 ③조봉암으로 대표되던 혁신계열이었다. 이영석, 1983《죽산조봉암》, 원음

호헌동지회는 12월 2일 야당연합 신당의 결성을 결의하고 24일에는 결속에 있어서는 기성조직을 초월한다는 신당 발기취지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12월 28일에는 신당촉진위원회를 18인으로 보강하고, 신당에는 반독재ㆍ반공원칙에 동의하는 인사라면 무조건 참여 시키기로 결정했다 18인 위원은 윤병호ㆍ장택상ㆍ조병옥ㆍ임흥순ㆍ윤제술ㆍ소선규ㆍ유진산ㆍ최갑환ㆍ곽상훈ㆍ송방용ㆍ김영선ㆍ이철승ㆍ김동옥ㆍ권중돈ㆍ김수선ㆍ정일형ㆍ신도성ㆍ이형남 등이었다. 정태영, 앞의 책, 221쪽
. 그러나 이러한 거의 무조건적인 신당계획은 후에 계속 반목하고 갈등하는 계기가 되었다.
2) 호헌동지회 내에서 ‘자유민주파’와 ‘민주대동파’의 분리
1955년 초에 공포된 신당발기 취지문에서 명시된 신당의 기본이념은 ①반공ㆍ반독재 ②대의정치 및 책임정치 확립 ③사회정의에 입각한 수탈 없는 국민 경제체제의 확립 ④민주 우방과의 협조 제휴를 통한 평화적 국제질서의 수립 등을 골자로 한 것이었다 김운태, 앞의 책, 108-109쪽. 신당추진위원회는 6원칙을 발표했는데 이 중 문제가 된 것은 ①좌익전향자 ②독재행위 및 부패행위가 현저하여 사회적 규탄을 받은 자는 신당 발기준비위원이 될 수 없다는 조항이었다. 이에 해당되는 사람이 조봉암과 이범석 및 장택상이었다.
.
그러나 호헌동지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범야당 운동은 정ㆍ부통령 후보문제와 당의 영도권 문제로 난항을 겪게 되었다. 당시 신당운동을 함께하던 3정파(민국당계열ㆍ자유당이탈계열ㆍ혁신계열)중에서 조봉암계열이 신당 참여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시함에 따라, 원내의 야당 연합의 신당 운동은 진보파의 조봉암의 포섭문제를 둘러싸고 반대하는 ‘자유민주파’(신익희ㆍ조병옥ㆍ곽상훈등을 중심으로 한 민주민국당 보수층)와 찬성하는 ‘민주대동파’(조봉암을 포함하여 대야당을 구성하자는 장택상ㆍ신도성을 중심)로 분열 되었다. 자유민주파는 민국당의 지방조직을 바탕으로 대통령 후보는 물론 당의 주도권을 장악하려고 했고 민주대동파는 조봉암지지파와 이범석을 중심으로 하는 족청계의 과거 조직을 기반으로 하는 당조직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립관계는 조봉암과 이범석의 참여 문제를 초점으로 부각시켰다. 이범석의 참여는 그가 과거 이승만 정권에 깊이 가담하였다는 점에서 일언지하에 거부되었다. 그러나 조봉암의 가입 문제는 그의 공산주의 경력과 맞물리면서 양자의 대립관계의 핵심적 논점이 되었다. 조봉암을 참여 시켜야 한다고 하는 옹호론자들은 조봉암을 참여시켜야만 민주대동의 신당이 이룩될수 있고 수권정당이 될수 있다는 주장이었고, 그의 참여를 반대하는 조병옥ㆍ김준연ㆍ장면은 조봉암의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반대파에 대해 조봉암은 〈신당운동에 호응할 터〉라는 제목의 성명을 1955년 2월 24일 발표하는데, 이것은 민국당 김성수가 조병옥, 김준연을 무마하기 위해 조봉암에게 요청했다고 한다. 정태영, 앞의 책, 221-223쪽. 그리고 장면, 김준연과 조봉암의 이념 논쟁은 이영석, 앞의 책, 204-207쪽 현신웅, 1992〈진보당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8쪽에서 재인용
신당운동은 이렇게 조봉암의 참여 문제로 약 7개월 간 진통을 겪으며 발기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이 발기준비위원회가 민주대동파와의 유대를 폐기한 자유민주파에 의해 장악되고 이들
참고문헌
박태균, 1995 ≪조봉암연구》, 창작과 비평사
정태영, 1991 ≪조봉암과 진보당≫, 한길사
황인진, 1993 ≪진보당 성격연구≫, 부산대학교 석사학위청구논문
현신웅, 1992 ≪진보당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김운태, 1986 ≪한국현대정치사 제2권≫, 성문각
이상두, 1985 ≪해방40년 혁신계 정당의 부침≫, 신동아 1985년 9월호
이영석, 1983 ≪죽산 조봉암≫, 원음
윤기정, 1959 ≪한국공산주의 운동비판 : 附진보당 사건기록≫, 통일춘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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