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 정권과 고구려 멸망의 관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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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며
Ⅱ. 淵蓋蘇文의 집권과 귀족 연립체제의 붕괴
Ⅲ. 연개소문 정권의 정책과 그 한계성
Ⅳ. 연개소문 정권과 고구려 멸망의 관련성
Ⅴ. 나오며
본문내용
Ⅱ . 淵蓋蘇文의 집권과 귀족 연립체제의 붕괴

642년 정변을 통해 영류왕과 반대세력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연개소문의 등장은 대내외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특히 귀족 연립체제로 유지 되고 있던 고구려 정국운영에 큰 변화를 초래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먼저 연개소문 집권의 배경으로서 정변 이전의 정치동향을 간단히 살펴보자. 평원왕대 이후에 막리지 중심의 정치운영체제의 구축을 통하여 당시의 귀족연립정권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은 내재화되고 있었다. 당시의 귀족세력간에 나타난 구체적인 갈등상은 알 수 없지만, 대외정책의 노선에서는 강경, 온건의 대립으로 표출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안장왕대에서 영양왕대에 걸친 정쟁의 한 축이었던 국내계 귀족세력이 평원왕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의 세력권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로 평원왕, 영양왕대에는 평양계 귀족세력이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영양왕 대에는 평양계 귀족들이 대외 강격책을 견지하며 對신라 對수나라 전쟁을 주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평양계 귀족세력이 대외강경책을 추구하였던 배경은 잘 알 수 없다. 다만 대외 전쟁활동을 통해 정치적 성장을 이루어온 자기 성장기반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온달이 北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大兄位에 오르고, 그 후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의 회복을 위해 강한 집념을 보인 것은 당시 평양계 귀족의 동향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영류왕 대에는 대외정책에서 영양왕대와는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먼저 대당관계를 보면, 영류왕 5년의 당과의 포로교환을 시작으로 하여 영류왕 6년부터 12년 까지 온건화평책이 추구되고 있었다. 물론 당의 대 고구려 유화정책도 고구려의 이러한 대당 온건책으로의 변화에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허나 당이 점차 자국 중심의 국제질서의 개편과 동시에 세력을 확대해 나감으로써 고구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구체적으로 당의 경관 파괴 직후에는 천리장성을 쌓아 적극적인 대비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당 세력의 확대에 따른 대외적 긴장이 고조되어 가면서 대외정책을 둘러싸고 강경, 온건의 대립이 격화되어 갔을 것으로 예상된다. 영류왕 초기 대당화평책을 구사하며 정국의 주도권을 잡아가는 국내계 귀족세력에 대하여 평양계 귀족세력도 당과의 긴장이 높아짐을 계기로 반격의 기회를 엿보게 되면서 다시금 내부갈등이 높아져 갔을 것이다. 이때 연개소문은 영류왕 25년에 천리장성 축조의 감독자로 임명되었는데, 이는 부직의 승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아마 연개소문의 아버지 대조는 당의 경관파괴를 계기로 천리장성의 축조를 주도하면서 대당강경파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三國史記》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연개소문이 장성축조 책임을 맡은 것은 營留王 25년으로 장성축조가 시작된지 11년 뒤이다. 앞의 《三國遺事》 기록은 연개소문과 천리장성의 축조가 그만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반영하고 있는데, 장성축조의 감독직무 자체가 부직의 계승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천리장성의 축조에 연개소문 아버지 大祚의 역할이 지대하였을 것으로 짐작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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