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 묘청과 김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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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시대배경
1. 중국과의 관계
2. 국내 정세

Ⅲ. 묘청
1. 묘청의 생애와 세계관
2. 서경천도과정
3. 서경천도지지세력

Ⅳ. 김부식
1. 김부식의 생애와 유교적 세계관
2. 서경천도론의 반대
3.『삼국사기』의 편찬
Ⅴ. 맺음말
본문내용
1. 김부식의 생애와 유교적 세계관
김부식(金富軾)은 신라 왕족의 후손이었다. 그의 후손 의식은 『삼국사기』의 편찬에도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는 고려 현종 이후 왕실에 신라 왕실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강조한 사론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마음속에는 전 왕족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졌을지 모르나 그의 아버지 대까지만 하더라도 당시 고려 왕조에서는 현실적으로 귀족 가문이 아니었고, 그의 형제들이 자신들의 가문이 한미하다고 여러 번 피력하고 있음은 이를 말해준다. 신라 왕족의 후예이면서 현실적으로 개경 귀족에 비하면 한미한 가문이었으므로 이러한 심리적 갈등을 극복하는 길은 열심히 공부하고 학문을 통하여 출세하는 길 뿐이었다. 김부식의 할아버지 때까지는 향직에 종사하는 향리였다가 그의 아버지 김근(金覲)대에 이르러 비로소 과거에 합격하여 중앙 관료로 진출하였다. 고려조의 중앙 관료는 개경 거주가 의무화되었으나 자신만이 개경에 거주하고 생활 기반은 아직 경주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김부식 형제가 어려서 경주에 살았다는 기록을 통하여 확인된다. 김근은 송나라 학문에 대한 최신의 정보를 알고 있었고, 이는 아들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김부식은 만 21세 때(숙종 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 관료로 진출하는데 바로 관직에 나가지는 못하고 몇 년 동안 서임을 기다리다가 정7품직에 초임되었고, 그 임기를 마칠 무렵 한림원의 직한림(直翰林)에 발탁되었다. 당시 직한림에 임명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과거에 2~3등에 합격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김부식은 과거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던 것 같다. 그 후 그는 때때로 다른 직에 드나들기도 하였지만 20여 년 간 한림원에 근무함으로써 자신의 학문을 크게 발전시킬 수 있었고, 특히 예종의 학문 우대 정책에 힘입어 크게 성장하였다. 예종 대에는 유교의 활성화를 위하여 국학에 7재등을 설치하였고 송나라에 유학생을 파견하는 등 송나라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김부식은 강경에 참여하여 임금에게 경전과 역사를 강하는 임무를 맡았다. 김부식은 『주역』을 다섯 번, 『서경』을 두 번 강경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 일반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쓰던 문체인 화려한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을 경박하다고 비난하고 당․ 송에서 발달한 고문(古文)체의 문장을 주창하였다. 이와 관련해 윤언이의 정치적 동지인 정지상과 사이에서 재미난 일화가 전해진다. 정치적인 견해에 있어서도 대립관계에 있었지만 문학적인 점에 있어서도 대립관계에 있었다. 이규보의 『백운소설』에 실려 있는 이야기를 보면 정지상이 죽은 뒤 곧 도깨비가 되었는데 김부식이 어느 날 봄을 읊은 시를 지었는데, “버들 빛 천 갈래 푸르고 복숭아꽃 만점 붉어 있네”이라 했다. 그런데 갑자기 공중에서 도깨비가 나타나 빰을 후려치며 “천갈래니 만점이니 씨부렁대는데 누가 세어보았더냐? 버들 빛은 가지마다 푸르고 복숭아꽃 송이마다 붉어있네라고 왜 말하지 못하느냐!”하고 꾸짖었다 한다. 또 김부식이 뒷날 절의 화장실에서 일을 보다가 정지상의 원혼인 도깨비에게 음낭을 잡혀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김부식은 고문체의 문장을 주장했지만 문학이 그의 전공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는 오히려 문학보다는 유교 경전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진 유학자였다. 그는 유교적 원리인 예를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보편성을 띈 것으로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이러한 유교적 예의 정신은 유교 경전의 지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고, 이에 대한 이해는 그가 새롭게 역사를 비판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사회가 혼란할수록 유학을 바탕으로 지배질서를 재정립해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교이념을 충실히 실천하려고 했기 때문에 풍수도참설이나 음양설에 따라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서경에 궁궐을 짓거나 천도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을 동원해 노역시켜야 하며 막대한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세금을 늘릴 수밖에 없을 텐데, 이는 올바른 정치가 아니라고 비판했고, 또한 사대교린의 질서에 반대하여 황제를 칭하고 독자 연호를 사용하자거나 금나라를 치자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 무렵 만주에서 새로 일어난 금나라는 거란족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이어 송나라를 쳐서 황제 부자를 포로로 잡기까지 했으니 금나라를 치자는 주장은 현실적으로도 무리였다.
그는 혈연적 유대감인 친친(親親)과 인위적 존비(尊卑)관계인 존존(尊尊)을 모두 존중하고 각각의 영역에 맞는 예와 정감을 설정함으로써 귀족사회가 갖는 지나친 보수성과 폐쇄성을 유교의 예론으로 정돈하고 문벌귀족 사회의 안정화를 꾀하였다. 즉 혈연적 유대감을 빙자하여 군권을 능가하는 이자겸류의 혈연귀족을 비판하고 국가의 공적인 영역을 부각시킴으로써 고려의 유교화를 지향하고 귀족질서의 영구화를 도모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고려사회를 기존 질서대로 재정비․ 강화하자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철저한 유교주의의 실천을 통하여 전통적인 문물제도를 중국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고려 사회의 유교화의 전진적 표현이었다..
참고문헌
도현철, 2000, 「12세기 公․私禮와 金富軾」, 『韓國史의 構造와 展開』 p.218

이종문, 2001,「김부식의 시 세계」, 『정신문화연구 2001 봄호』p.79

정구복, 앞의 논문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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