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은 어떻게 십자가를 배신했는가 -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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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십자군은 어떻게 십자가를 배신했는가?
-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
Ⅰ. 서론 - 십자군 전쟁
‘십자군’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혹은 이 이름이라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십자군은 지금으로부터 약 1000년 전에 있었던 전쟁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발발한 전쟁이기도 하다. 그리고 십자군 전쟁은 지금 우리에게 잔인한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쟁 중 잔인하지 않았던 전쟁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십자군은 그러한 전쟁들 중에서도 ‘신의 이름’을 통해 그 잔인성을 합리화한 전쟁이다.
나는 십자군 전쟁을 통해 인간이 ‘자신들만의 합당한 이유’ 안에서 얼마나 잔인하게 변모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결과 믿음을 가진 신앙인들이 자신이 믿는 대상을 어떻게 배신했는지, 더 나아가서는 이 역사를 통해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 싶다.
Ⅱ. 십자가의 의미와 십자군
당시 십자군은 1차 때까지만 해도 갑옷 등에 붉은 색의 십자가를 표시하여 원정에 나섰다. 그것은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들이 ‘신께서 허락한 군대’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갑옷에 그려 넣고, 상징으로 삼았던 십자가. 그 십자가는 단순한 문양이었을 뿐일까? 그 십자가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먼저 현대에 와서는 그 십자가가 많이 퇴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에서 십자가는 더 이상 종교적인 것만을 나타내지 않는다. 오히려 액세서리 중의 하나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그리고 설령 그것이 교회나 성당에 있는 종교적 의미의 십자가라 하더라도, 현대인들은 그 십자가에 큰 뜻을 두지 않는다. 다만 기독교를 상징하는 체계 중의 하나로만 가벼이 인식할 뿐이다.
현대의 ‘십자가’가 이런 의미로 현대인들에게 다가오고 있다면, 당시 십자군들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이었을까. 당시 중세 시대의 ‘십자가’는 권력과 권위의 상징이었다. 이것은 고대 로마 제국에서부터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고, 그 이후 차차 기독교가 국교화가 되는 과정 속에서 점차 기독교는 권력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현대의 기독교와 상당한 차이점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권력에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순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당시 중세의 기독교는 그런 상황이었다. 국교로 지정되어 박해도 없으며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시기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외적으로 드러난 것이 그러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당시의 기독교, 그리고 그 기독교를 상징하는 십자가는 시대적 분위기와 상황에 어우러져 권력의 대표적 상징으로 말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십자군은 이러한 당시의 십자가를 새긴 채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이러한 십자군은 과거 약 2세기(1096년-1272년, 176년)의 시간동안 일어난 사건이다. 총 1차부터 8차까지의 십자군은 처음에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 의해 호소되었다. 당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카노사의 굴욕’을 겪은 그레고리우스 7세 이후의 교황으로, 그에게는 교황의 권위가 세속의 권위보다 우위임을 확증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1095년 11월에 개최된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였고, 그 자리에 있던 군중들은 모두 십자군에 참여하겠다, 외치며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그 함성의 주된 내용이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Deus lo vult).”였다. 여기서 잠시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연설 내용을 살펴보자면 이러하다.
“투르크인들은 교회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신의 왕국을 약탈한 것입니다. …(중략)… 여러분에게 이를 권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 예수 바로 그분이시오. …(중략)… 그래서 그 불길한 종족을 우리 영토에서 멀리 쫓아낼 수 있도록, 여러분이 부단히 설교해 주십시오. …(중략)… 그곳으로 출발할 사람들과 가는 도중에 죽게 될 사람들, 이교도들과의 전투에서 죽게 될 사람들, 그들에게는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해 사면이 주어질 것입니다. 나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권위로써, 이 여정에 참가한 이들에게 사면을 허락합니다. …(중략)… 고로, 지금까지 신도들에게 손해를 끼치며 약탈하고 기만하는 전쟁들에만 참가해온 사람들은 이교도들과의 전쟁, 즉 나설 가치가 있는 전쟁, 마땅히 승리로 끝내야 할 전쟁에 부디 출정하십시오.” 최용감, 『중세사 안에서의 십자군 운동의 위치 : “기억과 화해, 교회의 과거의 잘못” 문서를 통한 반성과 더불어』, (광주가톨릭대학교 : 2002), 28p.
당시 교황의 직분은 ‘신의 대리자’였다. 그 이름 아래에서 교황은 하나님의 뜻이 바로 이것이라고 확신하였고, 나아가 그런 교황의 말을 모든 대중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지금 현 시대에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으며,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지만 이는 당시 시대적 배경과 상황에 맞물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일어나 받아들여진 일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십자군 전쟁이 제창된 그 시기는 바로 기독교가 국교화 되어 동로마와 서로마의 의식에 깊숙이 뿌리를 내린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당시 십자군 전쟁을 무조건적으로 잔인한 전쟁이었다, 라는 혹은 21세기의 관점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11세기부터 13세기의 전체적인 상황을 통해 십자군 전쟁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잠시 당시 시대 상황을 간략하게 언급해 보고자 한다. 당시 동로마는 7세기 전반부터 이슬람 세력에 침략당해 시리아, 팔레스티나, 이집트, 북아프리카 등을 잃었다. 게다가 11세기 말에는 소아시아까지 이슬람 세력이 영토를 넓히던 시기였다. 이에 동로마의 비잔틴제국 황제 알렉시우스는 가톨릭교회 수장인 로마 교황에게 파견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알렉시우스 황제는 비잔틴 제국의 영토를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았고, 더 나아가 과거 고대 로마 제국의 영토를 이슬람 세력에게서 되찾고 싶었을 것이다. 당시 로마 교황이 우르바누스 2세였는데, 그는 이 원군 요청에 십자군을 제창하게 된 것이다.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그레고리우스 7세 이후의 교황으로 선출된 자이다.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77년 ‘카노사의 굴욕’으로 알려진 사건을 통해 황제 하인리히 4세를 압박하였다. 이에 앙심을 품은 황제 하인리히는 그 후 주기적으로 교황을 압박했는데, 그것은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시대 때에도 여전하였다. 때문에 우르바누스 교황은 교황의 권위를 황제의 권위 위에 놓을 필요성을 느꼈고, 그러한 일련의 결과로 십자군 제창이 시작된 것이다.
참고문헌
■ 참고 문헌 ■
1) 시오노 나나미, 송태욱 역, 『십자군 이야기 1』, (문학 동네, 2011)
2) 시오노 나나미, 송태욱 역, 『십자군 이야기 2』, (문학 동네, 2011)
3) 시오노 나나미, 송태욱 역, 『십자군 이야기 3』, (문학 동네, 2012)
4) 빌 포셋, 권춘오 역, 『역사를 바꾼 100가지 실수 1』, (매일경제신문사, 2013)
5) 아민 말루프 저, 김미선 역,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아침이슬, 2002)
6) 박경수, 『교회사 클래스 : 한 권으로 끝내는 베이직 교회사』, (대한기독교서회, 2010)
7) 라은성, 『이것이 교회사다 : 묻어둔 진리』, (페텔, 2013)
8) 안상길, 『십자군 원정의 의의와 그 영향』, (광주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1988)
9) 최용감, 『중세사 안에서의 십자군 운동의 위치 : "기억과 화해, 교회의 과거의 잘못" 문서를 통한 반성과 더불어 』, (광주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2002)
10) 조원근, 『십자군 운동이 르네상스에 끼친 영향』, (아세아연합대학교 대학원,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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