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수건 - 이 시대의 진정한 이웃사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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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수건 - 이 시대의 진정한 이웃사촌
소설 속에는 많은 이들이 등장한다. 남자, 여자, 어른, 아이, 영웅, 바보 등 수많은 인물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하지만 수많은 등장인물 가운데에서 굳이 기억에 남는 이를 한 명 꼽으라고 하면 막상 쉽게 떠오르지가 않는다. 그만큼 나에게 있어 소설 속의 인물들은 그저 허구, 즉 상상의 인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 한 인물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그는 천재도 아니요, 그렇다고 인물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어쩌면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못한 얼굴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고, 천진난만한 바보 일 지도 모른다. 사람의 기억 속에 남는다는 건 무엇인가 특별한 인상을 주었다는 뜻인데, 그는 그러한 인상조차도 가지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의 이름은 ‘황수건’. 그는 자신의 이름이 황가인데 목숨수(壽)자하고 세울건(建)자로 황수건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노랑수건이라고 놀리어서 성북동에서는 가가호호에서 노랑수건 하면, 다 자긴 줄 알리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까지 한다. 자신이 놀림 받는 것조차 자랑스럽게 이야기 할 정도로 그는 순박하면서도 어리석은 인물이었다. 또한 ‘양복은 저고리를 먼저 입느냐 바지를 먼저 입느냐?’는 둥 ‘소와 말과 싸움을 붙이면 어느 것이 이기겠느냐?’는 둥, 이렇게 쓸데없고 기상천외한 질문만 하는 그를 볼 때면 그가 바보인 척 하는 천재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그에 관한 우스운 일화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가 학교의 급사로 있을 때 그가 남겨 놓고 나온 일화도 여러 가지라 한다. 그 중 하나의 일화를 옮겨보면 이러하다. 그는 “너의 색시 달아난다.” 하는 말을 제일 무서워했다 한다. 한번은 어느 선생이 장난엣말로, “요즘 같은 따뜻한 봄날엔 옛날부터 색시들이 달아나기를 좋아하는데 어제도 저 아랫말에서 둘이나 달아났다니까 오늘은 이 동리에서 꼭 달아나는 색시가 있을걸…….” 했더니 그는 점심을 먹다 말고 눈이 휘둥그래졌다 한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는 어서 바빠 하학을 시키고 집으로 갈 양으로 오십 분 만에 치는 종을 이십 분 만에, 삼십 분 만에 함부로 다가서 쳤다는 이야기이다. 그만큼 그는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순진한 인물이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이태준의 여러 단편작중 ,「달밤」이라는 작품 속에서였다. ‘황수건’을 처음 보았을 때, 그는 순진한 인물이라기보다는 어리석은 인물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를 연민이라는 감정으로 두둔하고 있는 화자를 솔직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시골 사람이라 하나 그는 그들 중에서도 유독 어리석은 인물이었다. 지혜롭지 못하며, 눈치도 없고, 이리참견 저리참견 오지랖만 넓은 인물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제일 싫어한다. 어리석은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눈치 없는 것, 특히 이리저리 참견하는 것은 싫어함을 넘어 혐오하는 편이다. 그러한 내가 그를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사람이란 좋아하는 것 보다는 싫어하는 것을 더 오래 기억하는 편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그러한 성격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나의 미움을 받기에 앞서 나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기 때문에 이리 오랫동안 그를 생각하며 기억하는 것이다.
사실 나의 관점에서의 ‘그’는 시대의 경쟁에 뒤쳐져 버린 ‘패배자’였다. 그런 그를 화자는 말동무도 되어주고, 장사밑천으로 쓰라며 돈까지 빌려준다. 또한, 그가 훔쳐 가져온 포도송이의 값까지 대신 치러 준다. 그의 잘못을 혼낸다거나 그의 말 많음을 나무라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순박한 인물’이라고 하며 그의 처지를 동정한다. 여기서 말하는 동정이란 불쌍히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그가 훔쳐 온 포도송이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탁자 위에 얹어 놓고 오래 바라보며 아껴 먹는다. 그리고 포도송이를 ‘황수건’의 순정의 열매라고 말한다. 또한 그가 보조 신문배달원에서 떨어졌을 때도 그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야박함에 원망스러운 마음을 보낸다. 도대체 화자는 어떠한 점에 이끌렸기에 ‘황수건’을 이처럼 아끼고 두둔하는 것일까?
나는 나의 생각을 잠시 배제해 놓은 채, 다시 한 번 ‘황수건’에 대해 생각 해 보기로 했다. 내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 것일까? 그를 그저 바보인물의 하나로 생각한 것이 잘못된 것일까? 그는 평범한 바보가 아닌 것일까? 이러한 무수한 의문들이 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그를 ‘패배자’로 낙인 찍어버린 것은, 어쩌면 나 자신 스스로도 알지 못한 사이 이미 무한 경쟁 시대에 익숙해져 버린 까닭일 것이다. 지금까지 내 삶의 지평선에는 ‘시험’과 ‘경쟁’이라는 두 개의 축이 놓여 있었다. 나는 ‘승리자’가 되기 위해 항상 누군가와 경쟁 해 왔다. 그리고 노력했다. 대학교에 들어와서도 나에게 처음 주어진 임무는 좋은 성적을 받아 10% 이내에 드는 것이었다. 이렇듯 나는 항상 ‘경쟁’이라고 불리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깨닫지 못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응애’하고 이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울음소리조차 어쩌면 얼굴도 알 지 못하는 누군가와의 싸움을 위한 ‘준비자세’ 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섬뜩했다.
인정에 각박한 세상을 손가락질 하면서도 진정으로 나의 인색함에는 무관심했다. 나를 중심으로 울타리를 쳐 놓은 채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 따위 가지지 못했었다. ‘황수건’이라는 인물이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너무 인색하고 각박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만큼은 아니겠지…….’ 하는 마음으로 세상의 각박함에 화를 내었다. 인정머리 없는 세상을 보면서 안타까워했고 슬퍼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알지 못했다. 이미 그러한 세상의 한 구성인으로서 내가 숨 쉬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미 익숙해져버린 세상의 모습에서 나의 잘못된 모습은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황수건’을 ‘패배자’로 불리 울 기준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내가 그를 판단해 버린 잣대는, 이미 물들대로 물들어버린 세상의 잣대요 기준이었다. 그는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다만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순박했을 뿐이고, 조금 더 인정이 많았을 뿐이다. 그는 바보가 아니라, 따스한 마음을 가진 ‘이웃사촌’이었다.
나는 우리 이웃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관심도 없었다. 내 삶에서 이웃들이란 관심조차 가질 필요 없는 유령 같은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부끄럽다거나 잘못되었다는 생각 따위 가진 적이 한 번도 없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바쁜 현대의 일상을 살아가며 어찌 새로 오는 이웃들을 모두 알 수 있을까? 그래서 엘리베이터에서 마주 치는 이들을 보며 인사 따위 나눌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만약 내가 그들에게 ‘인사’라는 것을 건네었을 때, 그들은 어떠한 반응을 할까? 자신이 알지 못하는 낯선 것이 아는 척을 했을 경우 사람들은 보통 당혹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러하기에 같은 아파트에 살지라도 ‘아는 척 하지 않기’가 불문율처럼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이 사회는 우리의 고유 정서라고 불리는 ‘정(情)’의 감정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한 글자에 불과한 이 단어에는 많은 의미와 가치가 내포한다. 우리는 어쩌면 진정한 보물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보물을 ‘황수건’을 보며 발견하였다. 그리고 또한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는 이 시대의 진정한 이웃사촌일지 모른다.
소설 속의 그는 항상 바보 같은 모습만 보여준다. 어리석고 순진하고 순박한 바보 같은 인물. 사실 그는 우리 주위에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사람 중에 한 명 일 것이다. 길을 가다가도 어디선가 만났을 것만 같은, 어디선가 보았을 것만 같은 그러한 평범한 사람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를 기억하며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아마 내가 놓치고 있었던 소중한 것을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그를 다시 한 번 회상하며 그의 이야기를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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