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 김장생과 우암 송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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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김장생과 우암 송시열
1. 禮學(예학)의 성립과 발전
1) 禮學(예학)의 성립
유학에서 가장 강한 장점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윤리도덕의식이다. 윤리도덕의식이야말로 유학의 발원부터 지닌 것이니 만큼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유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윤리 도덕의식은 유학의 발원 때 그것의 체계를 위한 이론화 작업을 처음으로 孔子(공자)가 시도 하였다.
부터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학이라는 말 자체가 朝鮮朝(조선조)에 생긴 새로운 학문으로 보는 것보다는 유학의 발원부터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다만 조선조에 와서 조선전기 道學(도학)이나 性理學(성리학)이 활발하게 전개된 관계로 조선조 유학을 전반적으로 구분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예학이라는 것을 명명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유학의 윤리 도덕의식이 시대를 통해 학문적으로 변천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용어이다. 장세길, 사계 김장생의 예학사상, 경인문화사, 2006, 2~3쪽 참고.
2) 조선시대의 禮學(예학) 등장 배경
조선 후기 思想史(사상사)에서 주목해야 할 흐름의 하나가 예학의 발전이다.
대개 임진왜란 이후부터 실학이 대두하기 이전 1백여 년간을 ‘예학시대’로 규정하는 것이 통설이다. 이병도, 한국유학사, 아세아문화사, 1987, 296쪽.
이처럼 예학이 한 세기의 유교사상을 지배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예학은 성리학의 발달이 가져온 부산물로 이해된다. 성리학에 입각한 17세기 예학정신은 天理(천리)에 따르는 禮制(예제)의 확립을 추구하며, 성리학의 바탕 위에 예의 형식적 준행이 아니라 의식적이고 자율적인 준행을 추구하였다. 따라서 성리학과 예학은 이론과 실천의 관계로 이해된다. 둘째, 왕실의 전례 논쟁으로 인한 파급효과이다. 인조대의 원동추숭문제와 현종대의 자의대비 복상 문제 등 왕실의 전례문제가 점점 심화됨에 따라 朝臣(조신) 朝臣(조신) :;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하고 있는 신하.
들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림들 또한 그 논쟁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예제의 본원적 의미에 대한 탐구가 예학의 등장에 발판이 되었다. 셋째, 17세기 이후 왜란과 호란의 영향으로 사회질서가 붕괴되어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윤리도덕이 땅에 떨어졌다. 유학의 핵심이라 하는 윤리도덕의식의 회복을 위해 국가가 취급하는 가장 시급한 문제로서 예의 확립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사대부들은 문제해결을 위해 기존의 예제와 예 정신을 더욱 더 엄격히 강조하였으며, 과정에서 종법에 기초한 주자가례를 깊이 연구하고 일상 생활화하여, 유교적 국가 사회를 재건하고자 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한국철학사상사, 심산, 2003, 254~255쪽 참고.
2. 예학의 대표 유학자 - 沙溪(사계) 金長生(김장생)과 尤庵(우암) 宋時烈(송시열)
:; 사계와 우암의 생애와 업적.
1) 김장생의 생애와 업적
김장생(金長生)의 고향은 광산,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이다. 김장생은 1548년(명종 3년)황강 김계휘의 장자로 한성에서 태어나 1631년(인조 9년) 연산향사에서 84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김장생은 예학 발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조선 예학의 종장(宗匠)으로 일컬어지는 학자이다. 그는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와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1534~1599)에게 배워 성리학으로 예학의 바탕을 마련하고. 정밀하게 예를 고증하는 데 힘써, 예학의 학문적 기초를 수립하였다. 그가 조선 예학의 일대 종사라는 평을 받는 이유는 예학에 대한 업적이 지대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학문적 업적에 앞서 거경준례(居敬遵禮)로 일관된 학행(學行)이 일대의 모범이 되었고, 또 그의 문하에서 당대의 예학자가 많이 배출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예학사에 있어 김장생의 위치는 예학을 학문적 위치에 올려놓은 점에 있다. 그의 예학은 종래 예학이 각종 의례를 이해하고 실천하기 위한 실용적 연구에 지나지 않던 것을 학술적 연구로 한 단계 끌어올린 것이었으며. 무의식적인 가례 준행을 의식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학문화한 것이다. 그는 또 정밀한 고증을 통하여 예(禮)시행을 뒷받침하는 본원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저술한 『가례집람 家禮輯覽』과 『의례문해 疑禮問解』는 조선의 예서 가운데 학문적 여건을 구비한 초기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며, 예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방향을 제시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한국철학사상사, 한울아카데미, 1997, 219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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