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포트 - 예학의 강화-김장생, 송시열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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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학의 강화-김장생, 송시열의 사상
1. 예학의 발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사회는 전 분야에서 병폐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집권층은 대동법과 호구 조사, 양전을 실시하여 허물어져 가는 봉건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예(禮)의 회복을 통해 봉건 질서를 유지시키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점에서 이 시기에 들어서는 주자학의 예학화 현상이 두드러졌다. 한편 조선왕조는 일찍부터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보급하는 등 예를 통해 통치 기반의 강화를 꾀해 왔으며, 이 같은 바탕 위에서 이 시기에는 예에 관한 학설의 수집과 정리 및 세목화 작업이 주자학자들의 주된 관심사로 등장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결과 이 17세기는 ‘예학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가 되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좌한국철학, 예문서원, 1995 p.169
이러한 예학의 흥성은 양란 이후 흐트러진 사회 질서를 바로 잡으려는 목적에서 비롯되었지만, 사회 기반의 급속한 해체와 예학이 당쟁과 깊이 연관되면서 원래의 목적과 기능은 탈색된 채 당파와 학파 간에 극한적이고 소모적인 대립을 거듭하게 되었다. 이것은 당시 사회를 지탱해주던 주자학이 이미 그 생명력을 상실해 감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좌한국철학, 예문서원, 1995 p.170
2. 예학의 강화
예(禮)에 관한 유학자들의 연구를 통칭하여 예학(禮學)이라고 말한다. 예학에 주목한다면, 조선시대 중엽에서 후기에 걸친 시기는 성리학자들에 의하여 예학이 발흥하였던 시기와 융성하였던 시기로 이어지며, 그 뒤에 그에 대한 개혁 혹은 개선을 추구하는 새로운 경향을 띤 실학자들의 예학이 대두되었다. 즉 16세기 사림의 도학정치가 정착되면서 예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 되었고, 17세기에는 예학이 융성하면서 많은 저술이 출현한 동시에 왕실 이전의 복제를 비롯한 중요한 의전 문제들을 둘러싸고 예송(禮訟)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18세기까지 지속되어 갔다. 그리고 18세기에는 실학자들에 의하여 현행 의례와 제도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과 그 구체적인 대안적 예시가 제시되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예에 관한 각종 논의와 저술이 당시 사족은 물론 조선 사회 구성원들의 삶의 양식과 사고방식을 형성하였고, 그것이 현대 한국인의 예 의식의 근저가 되었다. 고려대 민족문화 연구원 한국사상연구소, 자료와 해설 한국철학사상, 예문서원, 2001 p.513
조선 시대 중후기에 연구되고 실천된 예는 궁극적으로 사회 질서의 확립, 사회의 통합을 위한 것이었으며, 특히 그것은 유교의 종법제와 정통의 관념에 입각한 명분의 실천이라는 의식이 뚜렷하고 강하였다. 유교적 인륜도덕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부가장적 인륜 의식과 적장자 상속의 원칙에 입각하여 구현되어야 한다는 원칙 아래 예라는 규범의 학습을 통해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성리학자들의 의식이 특히 투철하였지만, 예설이나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다름이 있더라도 실학자들의 예학 역시 그것을 포기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리하여 성리학에 뒤이어 등장하는 실학에서 또한 예학이 유교의 도덕과 예에 의한 사회 통합의 길을 시대 상황에 맞게 추구할 때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고려대 민족문화 연구원 한국사상연구소, 자료와 해설 한국철학사상, 예문서원, 2001 p.514
1) 천리(天理)와 예제(禮制)
예의 근거를 밝히고 예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예학에는 도덕적 순수성과 명분(名分)에 따른 합리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 도덕적 순수성이란 사정(私情)을 절제하고 천리(天理)에 입각한 예를 따른다는 정신이고, 명분에 따른 합리성은 인륜과 종법에 따르는 사회질서를 건설한다는 정신이다. 예는 인간이 마땅히 행해야 할 원리, 또는 선의 덕목을 의미하며, 그 원리와 덕목은 의리와 명분을 근간으로 한다. 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철학사상사, 한울아카데미, 1997 p.224
17세기 예학은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제거한다(存天理去人欲)’는 이기성정(理氣性情)의 철학에 바탕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리설에 대한 이해 없이는 17세기 예학을 이해할 수 없다. 예학은 성리학의 ‘존천리(存天理)’를 천학으로 하여 천리의 ‘절문’을 밝히고, 사회적으로 적용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이(理)는 인간에게 내재하며, 이것을 객관적인 예제에 의해 행할 때에 개인·국가·세계가 천인합일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여겼다. 예학자들은 예가 단순히 외제적인 규범이 아니라, 인간에 내재하는 이(理)를 발휘하는 수단이라고 인식했다. 이와 같이 예학자들은 예학이 천리에 근거를 두었고, 그것은 인간에 내재하고 있으며, 자신의 행동 여하에 따라 천리와 합일될 수 있는 가능성을 예를 통하여 마련한다. 그러므로 예학의 본령은 예를 실천하여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이루려는 것이며, 이는 천리에 대한 규명과 체득이 그 바탕이 된다. 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철학사상사, 한울아카데미, 1997 p.225
2) 예에 의한 대의명분과 질서의 강화
당시의 의례가 중요하게 추구한 것 중의 하나는 종법(宗法)이었다. 그런데 주자학에서 추구하는 정통적 종법제가 위진 시대 이래 조선까지 내려와 작용하는 일종의 혈통 중심의 후계관습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에, 종법제의 시행은 조선 초기만 해도 그리 순조롭지 못하였다. 주자학적 정통적 종법제란 적첩(嫡妾)의 구별을 엄격히 하여 첩의 자식이 있어도 후사를 들여서 대를 잇는 방법을 택하는 것을 말한다. 즉 적계를 중시하는 원칙론. 명분론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혈통 중심의 후계 관습이란 형이 죽었을 때 그 아우가 계를 잇는 방법으로서 혈통을 우선시하는 원리를 말한다. 어쨌든 이러한 종법제가 완전하게 구현된 것은 아니지만 16세기 말부터 사람들은 종법제에 입각해서 가족 질서와 사회 질서 및 정치 질서의 변화를 이루어냈다. 이를테면 남녀균분상속으로부터 장자단독상속으로, 자녀윤회봉사로부터 장자봉사로, 형망제급의 양자제에서 의리명분론에 입각한 적계 중심의 양자제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사회 제도와 구조는 친가적장자 중심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17세기에 발생하여 당쟁을 심화시켰던 예송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종법과 정통에 관한 것이었다. 즉 적장자 계승을 원칙으로 하는 종법과 정통의 관념은 사대부의 가계에서뿐만 아니라 왕통에서도 역시 보편적으로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이 당시 사림파 예학의 공통된 입장이었다. 이러한 종법과 정통의 의미를 하나로 담은 개념이 종통이다. 그러나 종통의 개념을 사적인 가문의 경우와 공적인 왕가의 경우에 적용할 경우, 그 적용을 동일하게 할 것인가 다르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에 대해 유학자들이 개념적 이해를 달리하면서 예송이 시작되는 것이다. 고려대 민족문화 연구원 한국사상연구소, 자료와 해설 한국철학사상, 예문서원, 2001 p.521
3. 김장생(金長生, 1548~1631)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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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좌한국철학, 예문서원
*고려대 민족문화 연구원 한국사상연구소, 자료와 해설 한국철학사상, 예문서원, 2001
*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철학사상사, 한울아카데미, 1997,
*이덕일,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김영사, 2000
<토론주제>
1. 1차 예송논쟁의 문제점이 되었던 효종의 즉위와 같은 왕위계승에 나타나는 종통의 불일치이었습니다. 이에 관해 서인과 남인의 의견 충돌이 발생하였는데요. 서인 측의 주장은 왕가의 의례라 할지라도 원칙인 종법으로부터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관념으로서 이러한 규정에 의거할 경우, 효종은 왕통 상으로는 인조의 적통을 이었지만 종법 상으로는 인조의 둘째 아들이므로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는 ‘당연히 종법에 따라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였고, 남인 측의 주장은 허목의 차장자설에서 나타내듯이 차자로 출생하였더라도 왕위에 오르면 장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고 이러한 논리는 천리(天理)인 종법이 왕가의 의례에서는 변칙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예학에 입각하여서 서인과 남인의 의견 중 과연 어느 것이 더 옳은지에 대해 토론하여 봅시다.
2. 16세기 말부터 사람들은 종법제에 입각해서 가족 질서와 사회 질서 및 정치 질서의 변화를 이루어냈습니다. 이를테면 남녀균분상속으로부터 장자단독상속으로, 자녀윤회봉사로부터 장자봉사로, 형망제급의 양자제에서 의리명분론에 입각한 적계 중심의 양자제로 변하게 된 것인데요. 이리하여 사회 제도와 구조는 친가적장자 중심적으로 변하게 되었고, 그래서 여성들의 지위가 많이 떨어지고 법과 사상적으로 여러 가지 제한을 두어서 재혼금지, 남녀의 내외법, 칠거지악과 같은 부녀의 도리라는 것을 만들기에 이르렀는데, 그렇다면 이렇게 남녀에 차별을 두는 종법제가 과연 옳은지 아니면 왜 옳지 않은지에 대해 토론하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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