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 조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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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석 조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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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학가의 작품을 분석하기 위해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론을 원용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문학연구 방법론이라도 그것을 낳은 작가의 생애를 무시할 수는 없다. 한 작품이 잉태되었다면, 그 작품속에는 그것을 낳은 작가의 사상과 그 사상을 낳은 작가의 주변환경들이 어떤 형태로건 용해되어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엄정한 작품분석을 위해서는 그 정지작업으로서의 작가생애 연구는 필수적인 것이며, 그 생애는 온전히 재구되어야 한다. 본고에서는 작가 조명희에 출생부터 사망까지 그의 생애를 구체적으로 조명하고 이를 통해 그의 작품속에 묻어난 작가의 사상과 경향을 자연스럽게 유추해 보도록 하겠다.
1. 출생(1894)~일본유학(1919)
조명희는 1894년 8월 10일(음력 6월 26일)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한미한 무관관료 출신이었으며 포석이 나던 해에는 이미 칠순이었고 1897년 포석이 4살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한문과 국문을 모두 깨우친 당시로 보아서는 소위 ‘지식인’이었던 것 같다. 조명희는 그의 어머니에게서 문학적 소양을 물려받은 것 같으며, 그의 맏형 조공희에게서 당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세계관을 은연중에 교육받은 것 같다.
진천에 소학교가 서고 포석은 거기에 입학한다. 포석은 진천사립소학교를 졸업 후 셋째형 집에 머무르면서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그러나 그는 고보를 중도에 그만 둔 것으로 보이며 낙향하여 고향에 있었던 것 같다. 1914년 봄의 일이다. 그는 이 시기에 문학에 대한 소양을 쌓은 것 같다.
그는 12살 때 4살이나 위인 아내와 결혼한다. 그러나 그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애정도 없이 윗 어른들의 강요에 의해 한 결혼이었기 때문에 포석이 성에 눈을 뜨기 시작할 무렵인 15살 정도 되어서는 그녀를 노골적으로 싫어하였다. 그리고 이같은 상혼은 그의 소설 창작 초기 시절에 나타나는 여성혐오증과 밀접히 관련이 있다.
2. 일본유학시절(1919~1923)
1919년 포석은 동경으로 건너간다. 동경으로 간 포석은 동양대학 인도철학윤리학과에 청강생으로 적을 둔다. 거기서 김우진을 만나 극예술연구회를 함께 꾸려간다. 1921년 김우진과 함께 한달여 동안 모국에 돌아와 연극순회공연을 하는데 이 때 포석의 작품「김영일의 사(死)」가 공연되기도 한다. 그리고 한 때나마 사상운동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포석이 밝히고 있듯이 깊숙한 참여는 아니고 잠시 당대 조류에 휩쓸린 감이 있다. 포석은 당대 유행하던 사회주의 사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 수 있었다. 하지만 포석은 유물론에 입각한 철저한 사회주의자이기 보다는 관념론적 유심론에 입각한 낭만주의자에 오히려 가까웠다. 그는「생활기록의 단편」에서 ‘보헤미안’으로 자처하며 부르조아적 관념세계 위에서 생활하였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는 동지와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있었으며 ‘사회개조 보다는 인심개조’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당면 문제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조명희는 일본 유학시절에 철저한 사상관을 확립하였다고 볼 수는 없으며 당시에 사회주의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지 않아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는 쁘띠 부르조아 내지는 부르조아에 가까운 사상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일본 생활이 순탄한 것 만은 아니었다. ‘학비문제, 어학문제, 나이먹은 문제’등으로 문학 공부하는데 곤란을 겪게 된다. 어렵사리 학비를 마련하여 대학에 입학하며 이 시기 동안 하이네, 괴테, 타고르 등의 시 작품을 탐닉하기도 한다. 심각한 경제난과 아울러 지향하던 사상이나 철학이 마련되어 있지 못하던 포석은 방황의 행진을 계속하게 된다. ‘데카단이즘’과 ‘종교적 신비주의’의 포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정신의 안식처가 없는 극도의 분열된 사고를 지닌 채 포석은 1923년 초 학교를 중도 포기하고 끝내 귀국하고 만다.
3. 귀국(1923)~소련망명 전(1928. 7)
귀국 후 포석은 곧장 고향으로 간다. 귀국후의 고향생활에 대해서는「땅속으로」에서 잘 묘사해 주고 있지만 소련으로 망명할 때까지를 통틀어 이 기간 동안 포석은 늘 생활고에 찌들어 살게 된다.
1924년「봄 잔디밭 위에」란 시집을 발간하게 되나 이 시집의 내용이란 것들이 현실과 유리된 ‘타고르류의 신낭만주의’에로 경도된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1920년부터 시작하여 23년 전반기까지 그는 100여편에 달하는 시들을 발표하며, 「봄 잔디밭 위에」에는 미발표시 포함 43편이 수록되어 있다. 1925년경 포석은 <시대일보> 학예부 기자로 근무한다. 1924년부터 서울에 올라와 있었던 조명희는 나름대로 ‘현실주의’에 적응하려고 무던히 애를 쓴다. ‘현실주의와 현실에 부닥치자, 뚫고 나가자’고 스스로 다짐도 한다. 하지만 몰락해 가는 사대부 집안의 자손으로 가지게 되는 ‘영웅주의’와 동경 체류기간에 철저하게 물들었던 ‘연애 만능주의’와 ‘신낭만주의’, ‘신비주의’등의 사고를 하루 아침에 불식시킨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그리고 누가 보아도 안타까울 정도로 찌든 생활고로 포석은 정말 살아나가기에 바빴을 것이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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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노상래, 「조명희 연구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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