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화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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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남도화에 대하여
1. 남도화의 탄생 배경...
호남은 예향으로 자처하기도 하고 또 그렇게 불리우기에 손색 없을 만큼 뚜렷한 지역미술의 양식을 가진 곳이다. 물론 한국 회화사에서 남도화파, 즉 호남의 회화를 거론할만한 여건의 성숙은 근대 이후이다. 그것은 여타의 지역(서울과 지방과의 이원적 회화사를 전개하기엔 무리가 따르지만)과도 마찬가지이다. 일제 식민지 시절부터 해외유학을 했거나 새로운 미술을 앞세운 이들이 지방 도시를 활동 무대로하여 각자의 고향에 정착하면서 이룬 문화 형태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한 도시로 서울 외에 광주, 부산, 대구, 평양, 인천, 마산 등이 손꼽힌다.그 가운데서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남은 타지역에 비하여 보다 전통적 형식의 남종화풍을 승계한 전통회화가 강세였다. 다시 말하면 전남화단은 오지호가 새로이 서구 양식의 회화를 소개한 일도 큰 역할을 하였지만 의제 허백련의 광주 정착이 남도화파 형성의 근거가 되었으며, 여기에 목포의 남농 허건이 가세하였다. 이러한 근현대 전남화풍의 보다 근본적인 뿌리는 조선 말기의 소치 허련이 고향인 진도로 귀향하여 정착한 데 있다. 운림산방의 개설과 그곳에서의 화업 전승이 이루어 놓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타지역에서보다 전통성 강한 남도화파를 형성케 한 종자였던 셈이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조선시대의 한국 회화사에서 비중 있게 거론되는 작가들이 전남에서 배출되었던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즉, 능주의 양팽손, 해남 윤씨 일가의 윤두서, 윤덕희, 윤용 등이 그들인 것이다.
물론 이들의 회화는 주로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한 결과이므로 지역화단의 개창이나 계보적 연결로 파악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작가들의 배출이 전남회화의 심도를 깊게 한 것임은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서도 전남 회화가 지닌 특성이나 그 전통의 맥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윤두서의 경우에는 근대 이후에 이루어진 전남의 집단 개성적인 작업보다 회화의 정통성과 신선함이 더 강하다.
그럼 근현대 전남 화단 형성의 화파를 찾기 이전, 즉 조선시대의 배출된 작가 중 양팽손, 윤두서 등을 알아보고, 또한 허련과 그의 가업을 이은 아들 허형은 이곳에 정착하여 남도 적인 토착화풍을 풍의 뿌리를 내린 위치임을 감안하겠다.
2. 학포 양팽손(學圃 梁彭孫)
조선 초기(1392~1550경) 회화는 고려시대의 전통을 잇고,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화풍을 수용하면서 한국화풍의 기반이 형성되었다. 조선 초기의 회화 경향을 보면 중국 북송대 이후 양식화한 곽희화풍을 따른 안견(15세기)과 그의 화풍이 크게 유행하였고 남송 원체화풍인 마원하규 화풍을 따른 이상좌화풍 그리고 명나라의 새로운 화풍을 선보인 강희안 등을 거론할 수 있다. 양팽손이 활동한 16세기 전반의 중종 년간 화단은 산수화에 안견의 화풍이 압도하였고 구도나 필치에 점차 새로운 변모를 보여준다. 이 시기는 15세기 회화를 계승하면서 새로운 양식이 형성되는 과도기로 평가되는데, 안견파 화풍은 구도에 공간감이 확대되고 편파구도가 주로 사용되는 쪽으로 변해 갔다. 또 그 필치는 안견에 비하여 거칠어졌으나 당시의 특징 있는 한국적인 준법으로 정착되었다. 양팽손은 이러한 화풍을 지닌 안견일파 중 대표적인 선비화가이다. 양팽손은 문장과 서화에 뛰어났던 인물로「학포유집」이 전해 오지만 서화작품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의 작품으로 밝혀진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산수도」정도이다. 그렇지만 이 산수도는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을 만한 작품으로 화적이 적은 조선시대 초기의 회화 경향을 추적하는데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그가 귀향한 1520년 이후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그림의 우측 상단에 쓴 오언의 화제시는 그의 은둔생활 당시의 심경을 잘 말해 준다. 이 산수도는 경물을 좌측에 치우쳐 배치한 편파구도를 사용하였고 우측에 물과 낮은 평원을 넓은 공간으로 처리하였다. 좌측의 풍경은 근경, 중경, 원경을 뚜렷이 구분하여 삼단으로 배치하였으며 근경과 중경의 언덕, 산기슭은 각각 평행하여 안쪽으로 비스듬히 뻗어 있고 원경의 산은 안개 위에 수직으로 중첩시켰다. 그리고 중경에는 속세를 떠난 고사(高士)들이 둘러앉아 환담하는 다회장면을, 근경에는 누각과 수목을 그려 넣었고, 오른편으로 강에는 속세와 연결시켜 줄까봐 두렵다는 고깃배가 지나간다. 이러한「산수도」의 구도나 근경과 중경의 비스듬한 언덕, 수목 누각의 표현 등에서 전형적인 안견 화풍의 형식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다른 조선 초기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현존하는 작품이 많지 않은 편이라 양팽손에 대한 평가를 단정 내리기는 어렵지만 선비화가로서 안견을 따랐음은 분명하다. 안견 이후의 전통적 화풍으로 소재나 화면에서 중국적인 냄새를 탈피하지 못하였지만 새롭고 개성적인 변모도 가미되어 있다. 이는 그가 자라났던 곳이며 후에는 낙향하여 은거하였던 능주의 자연에서 얻어진 결과일 수도 있다. 또한 이 작품들을 통하여 중종대 화단의 동향은 물론, 당시 호남회화가 전대의 전통을 고수했고 사화를 피한 낙향으로 형성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생활상이나 전통성을 지닌 화풍의 경향은 서로 직접적인 회화의 교섭은 없었지만 다음의 윤두서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3. 공제 윤두서(恭齋 尹斗緖)
시, 서, 화 삼색인 윤두서(1668~1715)는 겸재 정선, 현제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의 삼재(제)라 일컬어지지만 활동시기로 보아 엄밀히 말한다면 중기(1550경~1770경)와 후기(1770경~1850경)의 변화기에 위치하는 작가이다. 그래서 그의 회화 역시 중기 전통화풍의 계승과 후기 신경향의 선구자로 거론될 만큼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먼저 양대 전난을 겪고 혼란이 계속되었던 중기는 이불해, 이정근, 이흥효, 이징 등 초기의 안견 화풍이 지속되었고 김지, 이경윤, 이정, 함윤덕, 김명국 등 중국 명대의 절파계화풍의 수입과 유행이 화단을 압도하였으며 남종문인화풍의 소극적인 수용 등이 엿보인다. 이 가운데 윤두서는 산수화에서 절파계화풍을 계승하였는데, 그러한 취향은 최근 공개된 그의 「기졸」의화평부분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즉 그는 조선 초기의 대가로 손꼽히는 안견과 그 일파에 대하여는 혹평을 가했으면서도 함윤덕을 「화원의 노수」로, 김지를 「안견에 버금가는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로, 김명국을 「화원의 누습을 벗어난 명가」로 지적하여 그가 심취했던 절파계화풍을 수용한 작가들을 호평하였다. 또한 그는 시대적 변동기의 미감을 구현한 회화관도 분명하였다. 즉 필묵법과 화학, 화식, 화공, 화재로써 화도에 이르는 오품론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더불어 그의 회화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자화상을 비롯한 서구화풍의 수용이다. 정면의 앞면만 부각시켜 자신의 심정을 잘 드러낸 「자화상」은 묘사방법이나 표현력에서 서구적인 소묘작품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목기 깎는 장면을 그린 「선거도」역시 소재나 표현에서 서구적인 냄새가 강하다. 이들 사실주의적 작품을 통하여 그가 서구회화와 접했을 가능성이 짐작된다. 그러한 가능성은 서학이나 새로운 학문에 관심이 컸었던 이익 형제들과의 만남, 그의 첫 번째 부인이 조선에 본격적으로 서구문화를 소개했던 지봉 이수광(1563~1628)의 증손녀였던 사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특히 이익을 비롯한 당대의 실학자들은 서양회화에 대한 인상이 깊었으며 그것을 통한 사실주의적 조형관을 가졌었다. 그리고 부인의 조부이며 이수광의 아들인 이성구(1584~1644)도 1637년과 1640년에 사신으로 심양에 다녀왔다. 물론 윤두서가 부인인 전주 이씨의 두 선조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는 않았겠으나 사위로서 새로운 문물을 수용했던 처가의 전통과 유품은 만났을 것이다. 이러한 윤두서의 남종화풍과 사실주의적인 회화 경향은 조선 후기 회화론 형성의 바탕을 이루었고 특히 남종화라고 하며화의불화형으로만 치달으려는 성향을 날카롭게 비판한 이익에서 정약용에 이르는 실학자들로부터 사실주의적 회화론으로 정립되었다.
이처럼 윤두서가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산수, 인물도 등 후기 회화의 선구적 측면도 물론이려니와 회화론에 있어서도 매우 크다. 또한 남도화단에서의 역할은 보수적인 성격으로 중기와 후기를 섭렵한 데 있다. 지금 남도 화단이 다시 생각해야 될 의식의 문제나 묘사력을 중시한 작가적 태도는 오히려 윤두서의 회화에서 배울 점이 많다. 이런 그의 회화는 아들인 윤덕희(1685~1766)와 손자인 윤용(1708~1740)에게로 가전되어 그 화맥이 형성되었는데 그들의 회화들은 새로운 경향보다 전통화풍이 강하게 나타난다.
4. 소치 허련(小痴 許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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