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조안의 두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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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조 안의 두 여인
두 명의 발가벗은 여인이 욕조에서 흥겹게 놀고 있다. 그들은 욕조의 가장자리 위에 걸쳐진 가볍고 밝은 천을 통해 대리석의 한기로부터 보호받고 있다. 무겁고 빨간 비단이 보이지 않는 금란에 걸려있는데, 앞부분은 모아져 있고, 뒤 부분은 틈을 가리기 위해 절반 정도 닫혀있다.
이 그림이 그려졌을 당시, 프랑스에서는 매우 적은 사람만이 목욕을 할 수 있었다. 16, 17세의 모든 계층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황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불결했다. 종교 개혁과 반종교 개혁의 도덕적 감시가 강조되었던 시기에는 과거 중세에 있었던 수많은 목욕탕과 사우나가 남자와 여자가 목욕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이유와 흥미로 만나는 장소라고 비난 받았기 때문에 오래 전에 폐쇄되었다. 미국에서 1493년에 건너온 것으로 추측되는 매독 때문에 목욕탕은 전염병을 퍼뜨리는 위험한 장소가 되었다. 오래지 않아 의사들도 목욕에 대한 경향을 승인했고 의학자인 Jean de Renou는 손은 씻어도 좋지만 발과 머리는 물에 거의 닿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그림에 있는 두 아가씨를 보고 떠올리는 것은 마지막 것인 그들의 머리와 아름답게 단장된 머리카락은 명백히 이런 위험한 요소와 맞닿아 있다. 그들은 잘 꾸며져 있고 진주 귀걸이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그들의 청결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적인 목적으로 목욕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욕조는 물이 아니라 태고부터 영원한 젊음을 가져온다고 믿어졌던 와인이나 우유로 가득 차 있을 것 같다. 1610년에 헝가리 여성인 Bathory 백작 부인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학살된 처녀들의 피로 목욕을 했다.
종종 피 뿐만 아니라 다른 액체에도 마법의 힘이 속해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실로 목욕은 일반적으로 미신적인 단어로 보인다. 점성가들은 그믐달이 뜨고 별이 빛날 원 표현은 hot 이지만 ‘빛나다 로 번역함
때 목욕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St John’ Eve에 물은 위협적인 악을 씻어낸다고 전해졌다. St Walburga’s Eve 5월 초하루 전날 밤 독일에서는 이날 밤 마녀들이 Brocken산에서 마왕과 주연을 가진다고 함
에는 특별히 모든 종류의 목욕의 마법의 힘이 상서롭다고 생각되었다. 마녀들은 그들의 안식일을 목욕을 하면서 준비했다. (적어도 마녀 시험의 기록에 의하면)그들은 욕조를 썩은 장작으로 데웠고, 방음재 효과를 가진 허브를 태웠다. 성직자들이 마법과 목욕을 비난하면서부터 두 범죄는 연결되었다. 악마가 욕조에서 마녀와 성교한다는 이야기가 돌았으며, 물에 그들의 미래의 남편의 얼굴이 나타나게 한다고 이야기 되었다.
그러나 이 그림이 그려졌을 때는 사람들은 마법뿐만 아니라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과 목욕에 대한 교회 조직의 저주까지 연관시켰다. 태고부터 수많은 나체의 여신과 함께했던 이탈리아로부터 다른 유럽은 아이디어와 르네상스의 시각적 단서를 끌어냈다. 프랑스에서 그들은 유행이 되었고, 궁정의 미인들은 샘에서 목욕을 했다. 그 과정에서 이교도 신과 친밀함을 느끼고 그들의 명성으로부터 이득을 얻었다. 플로렌스와 볼로냐에서 온 화가들은 퐁테블루 (아름다운 분수라는 뜻)에 있는 궁전의 방을 여신과 님프로 장식했다. 건축가들은 방과 대리석 욕조를 바꿔서 화장실이 포함된 appartements des bains를 고안했다. 이곳에는 프랑세수 1세가 그의 소유물 중에서 최고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걸었다. 또한 이 욕조 안의 두 미녀와 같은 수많은 작품들을 걸어놓았다. 이중 오직 몇 개만이 전해져 내려온다. 많은 작품이 사라졌고 대부분은 1676년에 오스트리아의 앤 여왕이 추잡한 악마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태웠다.
우리는 서명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이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알 수 없다. 오직 언제 그려졌는지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두 여인의 머리 스타일은 1594년과 1598년 사이에 유행했던 것이다. 이 작품의 차후 본의 이름에서는 오른 쪽의 금발 여성이 그 세기에 가장 아름답고, 가장 증오를 받았던 왕의 애첩인 Gabrielle d’Estrees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그녀는 거의 여왕이 될 뻔 했었다.
1573년에 태어나서 Gabrielle은 15세에 Valois 왕조의 마지막 왕인 Henri 3세의 궁전에 왔다. 궁전은 추문의 온상이었고 오래지 않아 많은 사건을 일으킨 것으로 보고되며, 그 중 하나는 잘생긴 Bellegarde와의 일이었다. Henri 3세는 세기 동안 프랑스를 두 무력 집단으로 갈라놓았던 종교 전쟁 중에 암살되었고 그의 합법적인 상속인이자 계승자였던 Henri 4세가 그의 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개신교인이었고 그의 가톨릭 과제를 깨닫지 못했다) Bellegarde는 왕실 기마단장 ‘the master of the royal stables’를 의역함
이었으며 군주와 함께 싸웠었다. 전쟁이 잠시 멈춘 사이에는 그는 경솔하게 왕에게 자신의 아름다운 연인인 Gabrielle에 대해 이야기했다. 1590년 11월 7일에 Bellegarde는 두 사람을 소개시켜 줬다.
Gabrielle d’Estrees의 긴 팔다리와 금발, 창백한 안색은 분명히 그녀의 시기의 이상적인 미인상에 가깝다. 그녀의 얼굴은 “진주와 같이 부드럽고 반투명이었으며 곱고 광택이 났다.” 이것은 아첨하는 궁정 사람들에 의해서 쓰인 것이 아니라 왕의 애첩 중 라이벌이었던 Mademoiselle de Guise가 한 말이라는 점에서 Gabrielle에 대한 중요한 근거가 된다. “그녀가 하얀 비단 드레스를 입었지만 이것은 그녀의 눈과 같은 피부와 비교하면 검은색처럼 보였다.”
물론 이런 창백함은 부자연스러웠다. 두꺼운 하얀색 화장이 얼굴뿐만 아니라 어깨와 가슴까지 칠해졌다. 입술과 젖꼭지에는 루즈가 발라졌다. Henri 4세의 직전 왕이었던 엽기적인 Valois 왕조의 궁전에서는 화장술이 진화되었고 남녀를 불문하고 고도의 수준까지 진화했다. 여성들은 적어도 뚜렷하게 병든 것처럼 꾸민 새로운 남자 왕의 밑에서 이러한 예술을 계속해야 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눈썹을 잡아 뜯고 새로운 선을 그렸다. 만약 그들이 가발을 쓰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들의 머리를 하얀 화장품과 파우더로 칠해야 했다. 인기 있는 금발이 되기 위해서 그들은 그들의 머리카락을 지독한 팅크제로 표백했고, 며칠 동안 태양에 이를 노출시키며 그 동안 태양빛이 그들의 하얀 피부에 내리 쬐지 않도록 신경 썼다. 말을 타거나 심지어 걸을 때까지 옷에 의해서 가려지지 않는 몸의 부분은 장갑과 비단 혹은 벨벳으로 된 안면 마스크로 가렸다. 여성들은 그들의 피부를 오직 두꺼운 벽 안이나 커튼 뒤에서만 노출했다. Gabrielle의 작은 금발 머리는 긴 목과 튼튼한 몸 위에 있어서 작아 보였고 그녀의 물결치는 머리카락에는 인상을 강화하기 위해 수수한 장식이 꾸며졌다. 이 머리는 넓게 주름을 만들며 올리거나 매우 뻣뻣한 레이스 칼라로 디자인되었다. 당시 스페인 궁정의 복장 (반종교개혁의 몸에 대한 적대심의 결과인 뻣뻣하고 부자연스러운 의복) 은 프랑스에서도 입고는 했다. 여자의 몸은 직선의 튜브 같은 쇠로 된 코르셋과 뻣뻣하고 패드가 넣어진 넓은 치마에 고통 받았다. 이것에는 가슴, 허리, 엉덩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Gabrielle의 나신에서 조차 우리는 이런 유행의 증거를 찾을 수 있다. 곡선이 없는 몸과 코르셋에서 벗어난 몸조차 곧고 부드럽게 남아있다. 그들의 의복에 대해 덧붙이자면 여성은 일반적으로 너무 많이 입고 무거운 장식물을 해서 그들은 마치 “성골함” 처럼 걸어야 했다. 남자의 안장을 타는 것을 선호했던 Gabrielle 은 오직 사냥을 나갈 때만 종종 다리를 녹색의 비단 스타킹을 입고 노출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흥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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