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연극 나의 희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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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16 / 2016.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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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극, 나의 희곡 - 수업이 끝난 후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다. 모든 것이 가능하다. 시간과 공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이라는 보잘 것 없는 배경에서 우리는 상상력이 발동하며 기억, 경험, 자유스러운 상상력, 부조리 그리고 즉흥적 생각의 단편들이 얽혀 극을 짜낸다. 이것들은 서로 연관성이 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꿈처럼 논리적인 설명도 가능한 것이다.」
-스트린드베리, 꿈의 연극의 서문에서-
나의 연극. 관객의 연극도 아니고 배우나 연출가의 연극도 아닌 나의 연극
나는 답답한 것이 싫다. 상투적인 것도 싫다. 교훈적인 것도 싫다. 지루한 것도 싫다. 딱딱한 것도 싫지만 너무 말랑한 것도 싫다. 이것은 단지 나의 연극적 취향에 불과한 것이지 나의 연극에 대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희곡은 입센의 페르귄트이지만 입센을 좋아하진 않는다. 입센을 좋아하진 않지만 그가 뛰어난 작가라고 생각한다. 내가 존경하고 따르고 싶은 작가는 없지만 그들 중 몇몇의 작품들은 나를 잠 못 들게 한다. 나의 책장에는 시와 소설이 꽂혀있지만 침대 옆으로는 희곡집들이 쌓여있다. 남의 작품을 읽고 연극을 보고 이론서들을 읽는 것도 좋아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나의 희곡을 쓰는 것이다. 희곡에는 가혹한 평을 잘 하지만 연극은 좋은 쪽으로 보려고 노력한다. 희곡은 개인을 창작물이지만 연극은 집단의 창작물이기 때문이며 나에게 희곡은 문학이지만 연극은 집단의 체험이기 때문이다. 즉 희곡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 현존하는 그 객관적 창작물이지만 연극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창작물을 통해 집단적으로 공감이 발생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의 연극에 대해서 얘기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연극은 집단의 창작물이기 때문에 나의 연극이 있을 수 없다. 내가 무엇을 얘기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의 희곡, 어떤 희곡을 어떻게 쓸 것인가가 될 것이다.
자유롭게
이번 수업을 통해 나는 내가 왜 연극을 하는지 어떤 연극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자기만의 연극을 하고 싶어한다. 셰익스피어도 입센도 피터 부룩도 아닌 나의 연극. 하나밖에 없는 연극. 우리는 쉽게 얘기한다. 관객을 위한 연극을 하자. 누가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한 단 말인가. 작가가 관객을 위하여 글을 쓰고 배우가 관객을 위하여 연기를 하는가. 예술가가 어떤 역사적 과업을 떠맡고 있다거나 아니면 관객을 어린아이와 같이 보살피고 배려되어야 할 약자, 예술적 어린아이로 보는 것인가. 우리의 그런 태도가 관객으로 하여금 점점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닐까. 관객과 함께 하겠다고 관객을 극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이나 관객의 적극적 반응을 불러일으키거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일련의 연극들, 극장주의나 표현주의 제의의 연극과 같은, 연극들이 도리어 관객으로 하여금 거부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왜 연극을 하는가? 누구를 위하여 연극을 하는가?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로운 영혼과 그것을 지켜내는 힘이다. 무엇을 위하여 글을 쓰고 예술을 하는가. 나를 위해서다. 왜? 내가 나를 표현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무엇이든 표현하고자 한다. 이 작품은 공연에 적합하지 않다. 때때로 어떤 이들은 공연에 적합한 희곡을 만들어야 한다고 얘기한다. 나는 단 한번도 공연에 적합한 희곡을 위해 고민하지 않았다. 않으려고 노력했다. 작가는 자유롭게 언어를 다룰 뿐이고 공연은 나의 몫이 아니다. 작가는 골조를 제시하는 것뿐이다. 나머지는 연출과 배우들, 디자이너들의 몫이다. 희곡이 소설보다 종종 더 적은 분량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해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희곡 안에 모든 것들을 우겨 넣는다면 그것은 대화문으로 이루어진 소설과 다를 게 없다. 진정 공연에 적합한 희곡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공연에 용이한 희곡이란 뜻이 아니라 그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열려있는 텍스트 일 것이다. 그런 텍스트는 작가가 거침없이 펜을 놀림으로 나올 수 있다고 믿는다. 괴테가 파우스트를 씀에 공연에 용이한 희곡에 집착했다면 그런 작품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그 매력 때문에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현실에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하고 싶어서. 현실과 다르다는 것. 모든 논리와 현실적 문제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다는 그것이 연극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나는 그 자유를 만끽하고자 한다.
지금 여기에서 쓰고 싶은
연극의 위기니 죽음이니란 말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연극은 그 시대가 낳는 문화적 사회적 산물이다. 사회가 존재하는 한 연극은 끊임없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에 유효한 연극은 무엇일까. 철학에 있어서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평행선으로 철학의 역사를 이룬 것처럼 연극에 있어서는 이성과 감성의 논쟁이 그 축이 되었다. 사실주의와 같은 이성적 논리에 의한 사조와 표현주의와 같은 감성적 직관의 논리에 의한 사조들의 엎치락 뒤치락거림이 연극 사조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개인과 집단, 신체와 감성이 있을 것이며 당대에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스펙터클과 신체기술, 무대기술에 중심을 둔 연극이다. 그것은 연극이 쇼나 서커스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에 연극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 문제와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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