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의 흔적을 따라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16.04.16 / 2016.04.16
  • 2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8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본문내용
‘김시습’의 흔적을 따라
쫓기듯 달려온 일주일에 피곤해진 터라, 이번 주말의 늘어짐을 만끽하고 싶었던 나는 아쉬워하며 경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워크숍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푸른글터 식구들을 보니 무척 반가워 피곤함이 달아났다. 그동안의 안부를 물으며 이동하는 동안 기림사에 도착했다. 오기 전에, 이번 여행의 필독서인 ‘나는 김시습이다’라는 책을 읽었는데, 흔히 ‘김삿갓’으로 많이 들어왔던 그분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해 잘 모르던 나는 이 책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 책을 쓰신 ‘강숙인’ 선생님을 직접 뵐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한 곳에 자리를 잡아 이 책이 어떻게 해서 쓰여지게 되었는지, 어느 부분을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하는지 등의 선생님이 해주시는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것 하나는 단종에 관한 것이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왕이 되는 과정에서 흔히 여러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최근에는 드라마로도 연출이 되었었다. 하지만, 단종은 지혜로움과는 멀게 느껴지는 배역으로 나왔었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의아하게 생각이 들었다고 하셨다. 그리고 김시습이라는 인물은 생육신인데, 이들보다 사육신을 더욱 알아주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살아있었기에 더욱 힘들게 살 수 밖에 없었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 어려서부터 김오세로 불리면서 출세에 대한 꿈이 있었으나, 날개조차 펴보지 못했던 김시습, 또는 생육신의 이야기들이 있었다. 역사적 기록에 한정되어있고 답답했던 드라마의 한계점을 앞의 이야기들과 선생님의 상상력으로 김시습, 그 주변 인물들의 삶을 글로서 표현한 것이다. 한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나는 김시습이다’라는 책의 의미를 더욱 깊이 알고 애착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는 김시습이 7년간 머물며 ‘금오신화’를 지었다는 남산 용장사지에 도착했다. 강숙인 선생님의 싸인을 받고 사진도 찍고 선생님과 헤어졌다. 그리고 등산이 될 줄 몰랐던 산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는 길의 하늘에 그늘이 없어 매우 더웠다. 그래도 함께 걸으며 오랜만에 맑은 공기를 마셔서 한동안의 답답함이 뚫리는 듯했다. 한참을 걸어 삼층석탑에 도착했다. 이곳은 해질 무렵에 매우 멋있다고 하는데 신라 사람들이 산 전체를 기단삼아 지은 의미도 있다고 한다. 시원하게 펼쳐진 풍경을 둘러보고 조금 더 내려와 그 전에 서 있었던 곳을 올려다보았다. 아까 내 옆에 있던 탑이 하늘과 닿을 듯이 서 있었다. 그 모습이 그전과는 또 달라보여서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하나 아쉬웠던 점은 이곳에서 ‘나는 김시습이다’라는 책에 대해 토론을 하려고 계획 되어있었는데, 다들 지치고 힘들어 보여서 생략하고 그냥 내려왔다는 것이다. 그때는 피곤해서 안하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야기를 못해본 것에 대해 못내 아쉬운 마음이 든다.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졸업][국어국문학] 김시습과 금오신화 연구
  • 김시습은 道仙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고 몸소 仙道를 닦았기 때문에 후세에 그의 인물이 寄傳化됨에 따라 마치 도술가처럼 과장된 점도 없지 않으나 도선의 본질에 대해서는 불교와는 달리 전적으로 배격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의 문집 『雜著』의 天形北辰上古性理修眞服氣龍虎의 7편은 다 유가의 입장에서 도교가 세상에 功用이 없고 허망한 것이라 하여 비판하였다. 곧 그는 도교의 본질면에 대해서는 유학자의 처지에서 비판부정하면

  • [국문학]조선 전기문학과 후기문학의 내용과 특징에 관한 고찰
  • 흔적이 보인다. 초기에는 한문으로 된 수필이 많았지만 후기로 오면서 차차 한글로 된 작품이 압도적으로 많아졌으며 민간과 궁중에서 함께 쓰였다. ⑴ 전쟁 체험의 기록 이순신 난중일기 , 유성룡 징비록 등⑵ 국내외 여행의 견문 기록 홍대용 을병연행록, 의유당 관북유람일기 등⑶ 궁중 기록 문학 계축일기, 혜경궁 홍씨 한중록, 인현왕후전 등6. 한문 문학의 변모와 실학파 문학과 위항문학의 대두조선 전기 도학 사상의 영향을 받은 한

  • 허균의 사상과 문학
  • 따라 항민(恒民), 원민(怨民), 호민(豪民)으로 나누면서 이들의 저항적 잠재력을 예리하게 파악하였다. 그에 의하면 세 부류의 백성 가운데 호민은 가장 무서운 존재로 나라의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다가 적당한 때가 오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자이다. 이런 점에서 호민은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다. 호민이 나머지 두 부류의 백성을 모아 기존 체제에 반기를 들면 농민저항이 된

  • 금오신화 연구 레포트
  • 김시습은 道仙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고 몸소 仙道를 닦았기 때문에 후세에 그의 인물이 寄傳化됨에 따라 마치 도술가처럼 과장된 점도 없지 않으나 도선의 본질에 대해서는 불교와는 달리 전적으로 배격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의 문집 『雜著』의 天形․北辰․上古․性理․修眞․服氣․龍虎의 7편은 다 유가의 입장에서 도교가 세상에 功用이 없고 허망한 것이라 하여 비판하였다. 곧 그는 도교의 본질면에 대해서는 유학자의 처지에서 비판․부정

  • 도교와 현대사회 우리 삶에서 찾을 수 있는 도교의 흔적
  • 따라 다도의 높은 경지에 이르면 사물과 나를 모두 잊을 수 있고, 자연이 내가 되고, 내가 자연이 되는 경지가 된다.중국의 다도역사는 당나라의 육우(陸羽)가 ‘다경(茶經)‘(760)을 짓는 것에서부터 문서화 되었다. 한국에서 다도의 역사는 신라의 화랑에 의하여 다도의 싹이 텄다고 할 수 있는데, 화랑도가 다도를 형성한 편모는 ’삼국유사’의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일본에서 다도의 역사는 센노리큐千利休에 의하여 완성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