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고대 중세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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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은 초대 브리튼 총독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에게 점령당했거나, 또는 그에 의해 건설되었다. 켄티쉬 래그스톤으로 건설된 시티 성벽City Wall은 타워 힐Tower Hill에 있는 세인트 알페이지St.Alphage 교회의 경내와 런던 성벽London Wall에서도 여전히 시야에 들어온다. 알프스 북쪽에서는 가장 규모가 컸던 대형 공회당과 포럼(공공광장)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1945년에 런던의 잃어버린 강물 중 하나인 월브룩의 지금은 말라버린 제방에서 미트라 사원의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로워 템스 스트리트Lower Thames Street의 북쪽 끝에서는 로마 시대의 목욕탕이 발견되었다. 아이언몽거 레인Ironmonger Lane 11번지와 잉글랜드 은행Bank of England을 포함한 시티에 있는 상당수 빌딩 지하에는 모자이크식 포장도로가 있다.
전성기 때의 로마 치하 런던의 인구는 2만 5천명 가량으로, 북부의 속주들 가운데 다섯번째로 큰 도시였을 것이다. 런던이라는 도시는 본질적으로 로마의 필요에 의해 로마의 솜씨로 만들어진 산물이었다. 로마인들은 강어귀에서 가급적 멀리 떨어진 곳까지 배를 몰고 가야했고, 브리튼 여타 지역까지 인력과 상품을 퍼뜨릴 수 있는 지점에 인력을 내려놓고 상품을 부려야 했다. 지금의 타워 오브 런던에서 워털루 브릿지Waterloo Bridge까지의 2마일에 이르는 북쪽 갯벌은 지층이 단단해 이런 목적을 위해서는 이상적인 언덕이었다. 로마 군이 사라진 410년에 런던은 힘없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알프레드 대왕 때와 덴마크왕 크누트의 시대에 약간의 부흥을 맞기는 했지만, 런던이 역사적으로 거론할 만한 명색을 되찾은 것은 노르만 정복에 이르러서였다.
<노르만 런던>
현재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예배당은 헨리3세의 치하인 1245년에 건축이 시작되긴 했지만, 두 곳 모두 노르만족이 만들었다. 정복자인 노르망디의 윌리엄 공이 영국 왕위에 오를 곳으로 웨스트민스터를 선택한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 이 수도원은 아이시절 타워에서 살해된 에드워드5세와 왕위를 포기한 에드워드8세를 제외한 영국의 모든 왕과 여왕의 대관식 무대가 되었다.
노르만의 통치가 시작될 때부터 국정의 중심지는 웨스트민스터였다. 당시 이곳은 버드케이지 워크Birdcage Walk에서 그레이트 조지 스트리트Great George Street로 접어드는 지점에 있는 좁다란 지협을 통해 본토로 연결된 섬이었다. 이곳이 궁전이라 불리는 것은 왕들이 살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왕들이 주교들과 속세의 중요 인물들로 구성된 의회를 소집했던 곳도 이곳이다. 웨스트민스터 홀은 리처드2세 치하에 완전히 새로 설계되었다. 그렇지만 왕과 여왕들, 윈스턴 처칠경이 안치된 곳일 뿐 아니라 찰스1세의 재판 같은 숱한 역사적 사건의 무대이기도 하다.
노르만의 수도였던 웨스트민스터가 런던이 국정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알려준다면, 타워 오브 런던은 런던이라는 도시의 전략적 중요성을 상기시켜준다. 타워는 요새였다. 여러 건물들로 이뤄진 타워의 장대한 구조와 해자, 강변의 공터는 그 자체로 런던의 역사에서 일어났음직한 일들을 가장 뚜렷하고 풍성하게 말해주고 있다. 이곳은 항구를 수비하는 요새였을 뿐 아니라, 왕궁이자 보고였고 초창기에는 조폐국이었다. 중세 초기의 런던을 탐구하고 그 시대의 시대정신과 역사를 알아내려면, 지금도 남아있는 색다른 건물 두 채를 언급해야 한다. 더램 성당이나 피터버러 성당에 비견할 만한 육중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훌륭한 건물은 세인트 바르톨로뮤 예배당이 있다. 이 교회 옆에는 세인트 바르톨로뮤 병원이 있다. 다른 건물은 템플 처치Temple Church이다. 템플 처치는 1185년에 세워졌는데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폭격에 손상을 입었지만 운 좋게도 건물의 대부분은 멀쩡하다. 템플은 구역 전체가 정부의 손에 넘어가면서 기사단의 손에서 벗어났고, 14세기에 호스피털 기사단은 이곳을 법률가들에게 임대했다. 런던의 중세의 아주 초창기부터 웨스트민스터에 자리잡은 정부의 핵심이라는 것을 살펴봤다. 런던은 타워를 통해 수호되는 거대한 무역항이었고, 의술과 또 다른 전문직인 법률의 위대한 중심지였다.
2. 바러(Borough)
<앵글로 색슨기>
앵글로 색슨기 웨섹스는 7왕국 중 하나였고, 웨섹스는 남영국의 많은 지역을 합병하여 통제했다. 주요 지역으로 둘셋, 햄프셔, 섬머셋, 윌트셔 주변 지역으로 드본, 버크셔 등이 있었다. 앵글로 색슨 왕국 중 정치적으로 동부와 남동부의 더 작은 왕국 즉 이스트 앵글리아, 애섹스, 켄트, 서섹스는 하위 왕국으로 지위가 격하되었고, 노섬브리아, 머시아, 웨섹스는 그 규모가 확대되고 있었다. 즉 앵글로 색슨 7왕국에서 점차 3왕국이 두각을 나타내어 노섬브리아는 영국인의 수중에 들어간 험버(Humber) 강 북부, 포스(Forth) 강 서쪽으로 아일랜드 해안까지 미쳤다. 알프레드 통치 이전 앵글로 색슨 왕국의 변화를 살펴보면 팬더(Penda)가 지배권을 확대한 650년부터 850년까지 2세기 동안은 노섬브리아, 머시아, 웨섹스 3왕국의 통합과정이었다.
<북구인의 침입>
앵글로 색슨 영국의 마지막 2세기 동안 북구인의 침입과 정주가 일어났다. 북구인의 원주지는 덴마크와 남 스웨덴, 노르웨이였다. 덴마크와 남 스웨덴의 거주민을 흔히 데인족이라 불렀다. 노르웨이 인의 경우 그들의 이주 집단이 영국에 도착하기 전, 켈트어 지역인 브리튼의 북-서 도서들, 아일랜드, 맨 섬(Isle of Man)지역에 한 세대 혹은 그 이상 머물렀다. 노르웨이에 기원을 가진 북구인은 영국의 제 도서와 맨 섬 등으로 아일랜드의 동쪽 해안인 더블린, Wezford, Waterfold에서 영구적인 정착을 시작했다. 그곳으로부터 브리튼의 서쪽해안의 켈트족과 색슨족을 약탈하고 있었다.
<알프레드의 방어와 바러건설>
앵글로 색슨 초기의 왕들은 수도를 한 곳에 정해 계속 머물지 않고 자신의 직속 관할지에서 옮겨 다니면서 생활했다. 왕은 자신의 거주지를 옮기면서 궁정에서 향연을 베풀고 거기서 방랑자 무리를 환대해 주변의 여러 지역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 무리의 환대를 나타내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북구인의 침입과 밀접한 연관이 있고, 왕이 있던 궁정조차도 방어상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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