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령丁玲딩링의 인생과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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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정령의 본명은 장빙지이며 1904년 호남성 북부에 있는 임례의 ‘몰락한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하였고 또 일본까지 유학한 지식인이었으나 정령이 4세 때 30여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혼자 남은 어머니는 자력으로 살아가기 위해 사범학교에서 공부하여 교사가 되었다. 정령은 진보적이고 자주적인 생각을 가진 어머니와 그녀의 학교친구인 향경예로부터 정신적인 큰 영향을 받았으며 가난하지만 자유롭고 참신한 소녀시절을 보냈다.
1918년 14살 때 송교인이 세운 도원여자사범학교 예과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을 냈으며 지기 왕검홍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5.4운동의 물결 속에 더 큰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1919년 여름 장사의 주남여자중학으로 전학하였다. 이 학교는 호남여성해방운동의 모태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향경예와 채창 등 많은 여성활동가를 배출하였다. 여기서 정령은 국어교사 진계민의 지도아래 빙심, 주작인, 호적, 진독수 등의 저작과 접하면서 신사상과 문학에의 흥미를 키워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1921년 존경하던 진계민 선생이 파면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정령은 이 학교를 자퇴하고 장사의 남녀공학이었던 악운중학으로 전학했다. 이 때 함께 입학한 양개혜(모택동의 첫부인)와도 사귀게 되었다. 그 이듬해 정령은 악운의 졸업증서도 버리고, 삼촌이 강요하던 혼약도 일축한 채 친구 왕검홍과 함께 다시 상해의 평민여자학교로 옮겼다. 당시 이 학교는 진독수를 위시한 유명한 공산주의자들이 만든 간부훈련학교였다. 이 때 정령은 빙지라 불려졌는데, 아버지쪽 성씨만 따른다는 것은 바로 봉건적 부권의 상징이라는 점을 들어 성을 쓰지 않았으며 그 후 가장 간단한 정자를 성으로 하고 영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택했다.
향학열과 자유의지에 불타고 있던 정령은 일관되게 공산당 간부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평민여학교에 만족할 수 없었다. 결국 정령은 왕검홍과 함께 학교를 퇴학한 후 남경 등지를 떠돌며 자유로운 유랑생활을 하였다. 이 때 러시아에서 막 돌아온 구추백을 만나게 되고 그의 소개로 1923년 상해대학 중국문학과에 입학하였다.
상해대학에 재학 중 구추백에게서 고금동서의 문학을 듣고 푸시킨을 원어로 읽게 되면서 그 언어의 아름다음을 배웠다. 또 모순으로부터 유럽고전문학을, 유평백으로부터는 송사를, 전환에게서는 보이트만 등의 서양시를, 진망도에게서는 중국고전을 배우면서 정령의 문학적 토양은 풍부해져 갔다.
1927년 국민혁명이 실패로 끝나고 4.12반공쿠데타 이후 경애하던 향경여, 양개혜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이 때의 상황을 정령은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에 정신적으로 대단한 고통을 받았다...소설이외에는 친구라고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쓰게 되었다. 나의 소설은 기세등등한 사회에 대한 멸시와 고독한 혼의 강렬함으로 가득차게 되었다.”고 쓰고 있다. 이 때 발표한 소설이 왕검홍을 모델로 한 몽가와 애정과 성에 대한 자유로운 발상이 엿보이는 소피여사의 일기였다.
이같이 창작을 시작한 정령에게 새로운 세계를 준 사람은 남편 호야빈이었다. 그는 시와 소설을 쓰는 극히 평범하고 가난한 작가였는데 1928년 9월에 들어서 노신과 풍설봉이 번역한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과 저서들을 읽고 또 진보적인 사회과학책을 접하면서 점차 혁명으로 기울어져 갔다. 이들 부부는 1930년 3월에 결성된 중국좌익작가연맹에 참가하였다. 호야빈은 중국 공산당에도 참가하면서 더욱 바쁜 나날들을 보냈으며 정령부부는 변함없이 글을 쓰는 가난한 생활 속에서 장남을 낳았다. 그러나 그 후 3개월도 되지 않아 호야빈은 국민당 특무대에 체포되어 1931년 2월 처형되고 말았다. 남편을 잃은 정령은 고향의 어머니에게 아들을 맡기고 슬픔을 잊기 위해 다시 문학 활동을 시작하고, 좌익작가연맹의 기관지인 <북두>의 편집인이 되었다.
국민당의 백색테러가 계속되는 어렵고 위험한 상황 하에서 간행을 계속하여 노신, 풍설봉, 모순 등과 만나면서 정령은 자유로운 비상의 꿈을 접고 혁명대열에 참가하기로 결심하여 1932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면서 당원작가로서 자기변혁을 시작했다. 그 후 1933년 5월 정령은 반재년과 함께 문학좌담회에서 돌아오다가 국민당 특무기관에 납치되어 남경에서 3년간 구금생활을 해야 했다.
1936년 송경령의 도움으로 남경을 탈출하여 공산당 근거지인 연안에 도착하였고 모택동을 만나고, 문예활동에 종사하였다. 연안에서 생활하면서 정령은 당중앙의 불합리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여 자아비판을 받기도 했다. 1942년 12세 연하인 진명과 결혼하여 평생을 함께 하였다.
1946년에는 대표작 <태양은 상건하를 비춘다>를 발표하였으며 이 작품으로 스탈린 문예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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