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견문 독서감상문 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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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유 견 문 >
Ⅰ. 공통사항
1. 지은이
유길준
개화사상가·정치가. 자는 성무(聖武), 호는 구당(矩堂). 본관은 기계(杞溪). 서울 출신. 1870년(고종 7) 박규수(朴珪壽) 문하에서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 개화청년들과 접촉하면서 신문물을 배웠다. 81년 신사유람단 조선 후기 1881년(고종 18) 일본에 파견한 시찰.
의 일원인 어윤중(魚允中)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수학하였고, 83년에는 미국 더머아카데미에서 공부하였다. 84년 갑신정변 1884년(고종 21) 김옥균(金玉均)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
의 소식을 듣고 1년간 유럽 각국을 순방한 뒤 귀국하였으나 개화파의 일원으로 간주, 체포되어 연금생활을 하였다. 이때 최초의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한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하였다. 94년에는 내무총신, 내무협판을 지내면서 개혁에 참여하였고, 95년에는 내부대신에 올라 음력 폐지·종두법 실시·우편개시·건양(建陽) 연호사용·단발령 실시 등을 과감히 추진하는 한편, 《독립신문》 발간에 국고보조를 단행하였다. 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건양 1)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왕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관에 옮겨 거처한 사건.
으로 일본에 망명한 뒤, 조선 보수정부의 전복음모를 모의하였으나 실패하여 오가사와라제도[小笠原諸島]에 유폐되었다. 1907년 귀국하여 국민경제회·흥사단·한성부민회 등을 조직하는 한편, 계산학교(桂山學校)·노동야학회 등을 설립하여 사회계몽운동에 힘썼으며, 1909년에는 국어학사상 최초의 문법서인 《대한문전(大韓文典)》을 간행하였다. 저서에는 《서유견문》 《구당시초(矩堂詩抄)》 《노동야학독본》 등이 있다.
2. 서유견문
조선 말 정치가 유길준(兪吉濬)이 쓴 유럽·미국 기행문. 1895년(고종 32) 도쿄[東京] 교순사(交詢社)에서 간행하였다. 1881년(고종 18)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가게 되면서 구상하였고, 83년 9월 민영익(閔泳翊)을 전권대신으로 한 보빙사(報聘使;친선사절단의 하나)의 수행원으로 선발되어 이듬해 11월까지 미국에 체류하면서 얻은 갖가지 견문과, 귀국할 때 유럽을 경유하면서 넓힌 견문·지식을 바탕으로 엮었다. 한국 최초의 국한문혼용체이며, 모두 2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2편에서는 지구에 대한 해설과 산·바다·강·호수·인종·물산 등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으며, 제3∼18편까지는 외국문물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는데, 국가의 권리, 국민의 권리와 교육, 사회적인 경쟁, 정부의 시초와 종류 및 치제, 정부의 직분, 그리고 세금·교육·군대·화폐·법률 등을 비롯하여 서양학문, 종교의 내력, 상업, 혼례, 장례, 친구와 여자에 대한 사교법, 의식주 및 농작과 목축에 관한 문제라든가 각종 오락회와 사회적 사업기관 및 여러 가지 문명의 이기 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제19·20편은 견문 위주의 기행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기행문이면서도 단순한 기행문으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고, 개화사상과 애국충정을 바탕으로 하여 저술되어 개화를 위한 일종의 교과서적 구실을 하였다.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는 언문일치의 사상은 새로운 문체형성에 이바지한 바가 크며, 외국문물 소개에 중점을 두고 있는 서술은 갑오개혁 이후 근대화에 있어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끼쳤다. 1책. 인본. 고려대학교도서관 소장.
① 집필 동기배경
유길준은 1885년 귀국하자마자 체포되어 포도대장 한규설의 집에 감금되어 있다 1887년 취운정으로 이감되어 육체적정신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서유견문을 썼다고 알려져있다. 민중의 친우- 유길준, 「유길준 전서」273쪽 참조
그러나 실제로 유길준은 연금기간 동안 흔히 알려진 힘든 상황에 처해있지는 않았다고 한다. 유길준 귀국 당시 갑신정변 이전 해외로 파견된 유학생들은 강제귀국 후 처형 되었다. 그런데 단발과 양복차림의 유길준은 어떻게 극형을 당하지 않고 한규설의 집에 감금되는 관대한 형을 받았을까? 그는 고종과 유길준을 둘러싼 측근의 옹호로 극형을 면하고 연금조치의 형을 받게 되었다. 유길준은 한규설의 집에 연금되어 있었는데 한규설은 유길준의 후원자였던 민영익의 후원을 받아 조선의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이러한 민영익과 유길준은 낙산서재 동창생으로 민영익과 관계를 맺고 있던 한규설은 그를 옹호하는 입장을 가졌던 것이었다. 그리고 한규설은 조선정부가 고용한 외교고문과 차관을 도입하는 등의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유길준 같이 영어에 능하고 국제법에 밝은 시무가가 필요했다. 이러한 일 외에 유길준은 한규설과 민영익의 보호 아래 비교적 창조적인 활동을 벌였다. 취운정으로 거처를 옮긴 유길준은 가끔 부인과 손님들을 맞으면서 집필에 전념 할 수 있었다. 황호근, 「참정대신 강석」, 「구당유길준」25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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