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문학작가교육론] 자하 신위의 시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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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자하 신위의 시세계
< 目 次 >
1. 서 론
2. 신위의 생애
2.1. 신위의 출생과 성장
2.2. 당파를 초월한 교우관계
2.3. 도망시(悼亡詩) - 절절한 가족사랑
2.4. 신위의 호탕한 인생 - 벼슬은 짧고 예술은 길다.
2.5. 시에 드러난 이상적 여성상
3. 신위의 시세계
3.1. 신위 생애 전반기의 시풍 -분여록(焚餘錄)
3.2. 논평시 -동인론시절구(東人論詩絶句)
3.3. 가을 속 서정시 -후추류시(後秋柳詩)
3.4. 객관적 현실인식 -잡서(雜書)
3.5. 신위 시체(詩體)의 특성 -소악부(小樂府)
4. 결 론
1. 서 론
자하(紫霞) 신위(申緯)는 익제 이제현 이래 조선조의 500년 문예를 집대성한 대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자하 신위가 살았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은 주자학에 대한 논란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것은 조선시대 사상을 지배했던 주자학이 근본정신에서 일탈하여 만들어진 폐단이 조선 사회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폐단이 정치, 사회, 문화 다방면에서 전개되어 다양한 부조리를 만들자 지배 계층에서도 문제를 제기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한 시대 속에서 살았던 자하 신위는 시와 그림, 글씨에 모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인물로 ‘詩中有畵 畵中有詩’라 주장하며 그림 같은 시를 쓰고 시 같은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위의 이러한 문학 성향 때문에 신위의 한시는 현실 문제보다는 예술세계를 지향했다고 판단할 수 있겠지만 그는 현실과 단절된 문학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신위에게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니듯이 문학과 현실도 둘이 아니다. 신위는 현실과 단절된 문학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시에는 반드시 사람과 시대의 모습이 담겨야 한다고 하였다. 신위에 대한 기존연구에서 현실인식만을 언급한 논문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작가론, 작품론 등에서 부분적으로 신위의 현실인식을 언급하고 있다. 다음 논문에서 언급한 신위의 현실인식은 주목할 만하다. 조기영(1996), 자하 신위의 碧蘆舫藏本 《唐詩畵意》에 대하여.
본고에서는 벼슬은 참판과 대사간에 오르는 데 그치고, 정치적으로는 불행했으나, 호탕하고 풍류적인 예술인의 삶을 살았던 신위의 삶과 문학을 조명하되, 신위의 삶과 정서, 사상이 잘 드러나는 작품들을 선별하여 그의 생애와 시세계를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2. 신위의 생애
2.1. 신위의 출생과 성장
신위는 1769년(영조45)에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한수(漢), 호는 자하(紫霞)ㆍ경수당(警修堂)이다. 김택영의 <자하연보 紫霞年譜>에 의하면 신위의 호는 원래 홍전이었는데 관악의 자하동 별장에서 수학했으므로 호를 자하로 바꾸었다고 밝히고 있다. 아버지는 대사헌 대승(大升)이며 어머니는 이영록(李永祿)의 딸이다.
서울 장흥방에서 출생하여 9세에 처음으로 학문을 시작하였으며 일찍부터 재주가 널리 알려져서 정조 임금이 불러 시험해 보기도 하였다고 한다. 16세에 당시 예조좌랑이던 서화에 능한 조윤형(1725-1799)의 딸과 혼인하였다. 1799년(정조23)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발탁되었으며, 그 후 10여년 동안 관직에 머물었다가 1811년(순조11)에 내직으로 옮겨 정3품에 오르게 된다. 1812년(순조12) 진주 겸 주청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갔는데, 이때 그는 중국의 학문과 문학에 대하여 실지로 확인하면서 자신의 안목을 넓히는 기회로 삼아 중국의 학자ㆍ문인과의 교유를 돈독히 하였다. 특히 당대 대학자 옹방강(翁方綱)과의 교유는 그의 문학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814년에 병조참지를 거쳐, 이듬해 곡산부사로 나갔는데 이때 피폐한 농촌의 현실을 확인하고 농민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조정에 세금을 탕감해달라는 탄원을 하기도 하였다.
1831년(순조31)에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임하고 그 다음해 도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생활에 환멸을 느낀 끝에 사양하여 나가지 않았으며, 대사간에 제수되어 이에 임했으나 경기암행어사 이시원(李是遠)이 강화유수 때의 실정을 거론, 상소함으로써 평산에 유배되었다. 1838년 가을 휴가를 얻어 여행을 하며 많은 자연 산수시를 지었다. 그 후 1843년(헌종9) 75세에 가의대부에 가자되었고, 1845년(헌종11) 77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이 후 아들 명연이 부친의 유고를 거두어 문집을 엮었는데 그의 문집으로 시 4,000여 수를 수록한 《경수당집 警修堂集》(16책 85권)이 전하며 당시(唐詩) 가운데 화의(畵意)가 풍부한 작품만을 뽑아 편집한 《당시화의 唐詩畵意》가 있으며, 그밖에 김택영이 중국에서 간행한 《신자하시집 申紫霞詩集》(2책)이 있다.
신위는 당시 시ㆍ서ㆍ화 의 3절로 일컬어졌으며, 조선 이래 시작이 가장 많았었고 백년 이후의 시인들도 모두 그를 작시법의 스승으로 추대하였다. 천재적 시인으로 그의 이름은 국내보다 중국에 널리 알려졌고, 청조의 시풍을 민감하게 받아들여 참신한 시를 썼다. 그의 시작품 속에는 애국 애족적인 정신이 잘 나타나 국산품 애용, 양반 배척, 서얼의 차별대우 철폐, 당쟁의 배격 등을 제시했다. 그는 시에 있어 한국적인 특징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없어져가는 악부(樂府)를 보존하려 하였는데, 한역한 <소악부 小樂府>와 시사평(詩史評)을 한 <동인론시 東人論詩> 35수와 우리나라의 관우회를 읊은 <관극시 觀劇詩>가 바로 그것이다. 이외에도 중국 왕사정(王士禎)의 <추류시>를 본떠 지은 <후추류시 後秋柳詩>, 신분제도ㆍ화폐개혁 등 현실문제를 다룬 <잡서 雜書> 등이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589면.
또한 그림은 산수화와 함께 묵북에 능하였는데, 이정(李霆), 유덕장(柳德章)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손꼽힌다. 강세황(姜世晃)에게서 묵죽을 배웠던 그는 조선 후기의 남종화(南宗畵)의 꽃을 피웠으며, 그의 묵죽화풍은 아들 명준(命準)ㆍ명연(命衍)을 비롯하여 여러 화가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글씨는 동기창체를 따랐으며 조선시대에 이 서체가 유행하는 데 계도적 구실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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