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이준식 국가기구에 의한 친일청산의 역사적 의미 를 읽고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15.03.29 / 2015.03.29
- 2페이지 /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800원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1
2
추천 연관자료
- 본문내용
-
이준식, 「국가기구에 의한 친일청산의 역사적 의미」를 읽고
2005년 5월 31일, 2006년 7월 13일에 각각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하 반민규명위)와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이하 친일재산조사위)가 각각 출범했다. 해방 직후에 하루빨리 해야 했던 친일파 청산이 반세기 넘게 흘러서라도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원을 받고 진행됐다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민족반역 · 대적협력행위에 대한 처벌은 세계사적 보편성을 갖는다고 한다. 본문 p.110 부분인용
개인적인 의견으로도 충분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찌 한 국가에서 조국을 배신하고 적에게 협력한 사람들을 가만히 둘 수 있겠는가? 당위성 문제로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다. 비록 우리나라의 친일전범자에 대한 사회적 처벌은 나치에 굴복했던 많은 유럽 국가들이나 일제의 점령이라는 우리와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는 중국의 경우보다는 강도 면에서 매우 유약했으나 이러한 세계보편적인 현상을 어김없이 따라가고 있으며,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러한 흐름을 따라가기에는 이미 많이 늦었다는 감이 든다는 것이다. 친일파들이 이 나라에서 일제시대에,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외부적인 영향(특히 미국의 친일파이용) 때문에 청산되지 못했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정치면에서 한눈에 봐도 눈에 띄는 큰 흉터처럼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사회악으로 남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역사를 배우기 전만 해도 친일파는 친일파 따로 있고 정치하는 사람들은 정치하는 사람 따로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몇몇 사람들은 현대까지 잔존하여 기득권층으로 자리 잡은 친일파들이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몇몇 부조리들은 그들 친일파들과 그 자손들의 양심을 저버린 행동으로 인한 것을 알고 나서, 조속한 친일파처리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논문을 읽으면서 한 가지 의아했던 점은 ‘이 당시 친일파는 모두가 우파에 속했는지’이었다. 미국이 반공을 위해서 친일파를 적극 활용하고, 이승만 정권도 반공을 위해서라면 친일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논리로 친일청산을 반대했는데 이 논문에서는 친일파의 좌 · 우 여부를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고 있어서 궁금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우파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본은 당시 독일 · 이탈리아와 함께 전체주의국가에 속했고, 전체주의는 공산주의를 끔찍이 배척했다. 그리고 일본은 서양으로부터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면서 공산주의를 받아들일 필요성이 전혀 없었을 것 같다. 일본에 대해서 공부하고 일본에 기대어 위세를 누린 친일파들은 이러한 이념적, 체제적인 영향을 받아서 우파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여튼, 공교롭게도 이러한 친일파의 성격덕분에 애초부터 정리되지 못하고 오히려 반공을 주도하는 사회기득권층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본문에 있는 반민규명위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서 생각보다 눈에 띄는 이름들이 많이 보였다.(백선엽, 노덕술, 김성수, 김활란, 백낙준, 정인익, 서정주, 유치진, 이광수, 주요한, 채만식, 최남선, 현제명 등) 특히 문화계 쪽에서 유명한 이름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언젠가 백선엽이라는 사람을 방송에서 6 · 25전쟁 당시의 전쟁영웅으로 비춰 그 사람의 6 · 25전쟁의 경험과 상황을 들어보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었다. 그 때는 백선엽이 친일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저 전쟁에서 공을 많이 세운 노병으로 생각했다. 그 다큐멘터리가 방송되고 난 뒤, 인터넷 검색창에 그 사람의 이름이 뜨고 친일파였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 실망하고 분개했던 기억이 난다. 그는 일제시기에 간도특설대로서 활동하면서 조선인 게릴라들을 소탕하는 데 참가했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월남하여 반공주의자로 활동하다가 미국의 눈에 띄어 군으로 출세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간도특설대에 대한 회고는 당시 상황이 조선인이 조선인을 잡는 이이제이에 완전히 말려든 형국이었으며 자신의 행동은 민중들에게 평화를 하루빨리 가져다 주기위한 것이었고, 만약 자신이 일본을 배반하여 게릴라에 동참했더라도 독립이 더 빨리 이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원래 군인이 되기를 원했던 그는 독립군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만주군관학교에 갔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일제의 이이제이에 쉽게 말려들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민족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자기민족의 게릴라를 소탕함으로써 평화를 지킬 것이 아니라 일제의 횡포로부터 민중을 조금이라도 지켜줘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애국다운 애국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스스로 그런 기회를 포기해서 친일파로 낙인찍히게 된 것이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하였다.
반민규명위와 친일재산조사위에서 한 일은 분명 사회적으로 많은 호응을 얻었고, 또한 어느 정도 성과를 남겼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 밝히고 있는 이 두 위원회의 활동은 아쉬운 점을 많이 담고 있다. 특히 친일파 자손의 재산문제가 그것인데, 친일파로 규정하기 위한 증거적인 한계가 존재했고 시간의 경과로 인한 재산권의 변화로 더 이상 친일파의 재산이 아닌 것들이 많았으며, 재산권 간섭은 애초부터 위헌이라는 비판을 안고 있었다. 1950년대와는 너무도 많은 것이 변해버린 현대 사회에서 법과, 시간이 친일파청산을 가로막는다는 점은 참 안타깝다.
많은 사람들이 친일파 청산에 찬성하고 있고, 그에 대한 활동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국가는 당장 친일파 청산을 할 생각이 없어 보이고, 더 큰 문제는 여전히 사회기득권층에 친일파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사회 곳곳에서 여전히 자신의 이득을 야금야금 챙기고 있는 친일파의 자손들을 정리하는 것은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올바른 민족관을 정립하게 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며, 국가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현 정부에서는 불가능할지라도, 빠르면 다음정부에서, 되도록 늦지 않게 친일 청산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자료평가
-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