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죽거리 잔혹사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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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죽거리 잔혹사 분석>
‘이소룡의 절권도는 과거 무도인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단순한 무도가 아니라 오직 싸우고, 이기기 위해 창조된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절권도는 우리에게 뒤돌아 볼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길이 정해졌으면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부르스 리, <절권도의 길> 중에서-
위 글은 ‘부르스 리’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영화의 도입부에 나오는 말이다. 이는 소통이 아닌 통제만이 존재하는 정문고등학교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동시에 다른 친구들을 밟고 승리해야지만 얻어낼 수 있는 한국의 대학 입시를 빗대어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절권도란 이소룡이 창시한 무술로, 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동시에 공격을 하기 위한 테크닉으로, 다분히 경쟁적이고, 상대를 굴복시킨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협력이 아닌 경쟁, 패배가 아닌 승리를 최고로 삼는 말죽거리 잔혹사의 상황을 절권도는 적절하게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인용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절권도의 목적은 ‘오직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창조된 것으로, 영화의 전체 내용과도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이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은 학교 폭력과 더불어 흘러 가며, 그 폭력의 끝에는 ‘힘과 권력을 가진 자’ 의 승리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시대적인 배경은 군사독재가 지배하던 유신 말기의 시대로, 사회 전반적으로도 폭력이 난무하던 시기였다. 그러한 정치 및 사회적인 폭력은 고스란히 정문고등학교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고, 학생들 간의 폭력이 이를 증명해준다. 각자의 삶을 설계하고, 행복한 미래를 꿈꾸어도 모자랄 학생들이 이미 (폭력과 권력에 대한) 복종과 굴욕에 익숙해져 희망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당시 사회의 교육 목표는 학생 개개인의 자아실현이 아닌, 오로지 국가의 발전을 위한 것으로 치부되어졌기 때문에 학생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 시대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수업은 마치 공장에서 필요한 상품들을 찍어내듯, 암기 잘하는 학생들을 사회 속으로 배출해내는 데에만 열심이었다. 지식을 주입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던 말죽거리 잔혹사 시절, 선생님들은 교육보다는 통제에 비중을 두었으며, 자연스럽게 폭력과 같은 비인간적인 교육 방법이 자리잡게 되었다.
정문고등학교의 수업방식은 학생들로 하여금 ‘배움으로부터의 도주’를 하도록 강하게 채찍질 하고 있다. 강한 프레이밍의 주입식 교육과, 그로 인해 획일화된 수업, 대학 입시를 사이에 둔 경쟁 교육, 과정이 아닌 성적만을 바라보는 결과 중심의 교육으로 학생들은 공부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토 마나부 교수는 이러한 현상이 일본, 한국,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국가의 학생들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으며, 그 형태는 등교 거부, 이지매, 학업 중단, 의욕 부진과 같은 다양한 모습으로 발생한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동아시아 국가의 학생들은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양의 학습 노동에 시달리게 되며, 그로 인해 공부에 대한 흥미를 일찍이 잃어 버리게 되어, 결국에는 배움의 참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고 예측한다. 한국의 청소년들은 단순히 학습의 양뿐만 아니라, 수면시간의 양에 있어서도 그 시간이 현저히 부족하다. 성장기임에도 불구하고, 수면 부족으로 인한 피로함은 물론이고, 과도한 학습 노동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우울증과 불안 증세와 같은 정신적인 질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부담스러운 학업 양과 수면 부족 그리고 경쟁적인 대학 입시 구조와 같은 복합적인 요인들이 오늘 날, 한국 청소년들로 하여금 배움으로부터 도주를 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도주 현상은, 비단 정문고등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과거 모습에서도 쉽게찾아 볼 수 있다. 각자의 중.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보면,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새로운 지식과 가치를 배우는 데에 기뻐했을까? 혁신학교나 대한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라면 수업 시간이 즐거웠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일반학교를 졸업한 대다수의 학생들이라면 시험을 몸서리치게 싫어했을 것이며, 시험 기간이 되면 푸석한 얼굴을 하고, 몽롱한 눈빛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하물며 폭력이 만연하고, 인권이 무시되는 정문고등학교에서 어떻게 입시 공부를 즐겁게 할 수 있을까? 결국 종반부에 이르러서는 현수와 우식은 고등학교를 그만두게 되는데, 이 때 배움으로부터의 도주 현상을 겪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도주 현상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학업 중단의 단계에까지 이르렀으며, 교문을 나오며 현수는 ‘대한민국 학교 다 X까라 그래!’ 라고 소리 친다. 1970년대 당시의 대한민국 교육과정에 대한 불만과 증오를 10대의 거친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현수의 학업 중단 상황은 전적으로 현수의 책임만은 아니다. 폭력이 만연했던 학교의 책임과 폭력을 일상화시켰던 교사들, 그리고 더 크게 나아가서는 친구들간의 경쟁을 부추기는 비인간적인 대학 입시 제도, 더 확장시켜서는 폭력과 비리가 만연했던 당시 사회와 정치 제도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
잠재적 교육과정의 측면에서 바라보자면, 정문고등학교는 철저히 계급화된 사회로, 학생들에게 권력에 복종하는 법을 습득시키고 있었다. 권력과 돈, 그리고 성적에 의해 차별이 이루어지는 모습이 사회의 씁쓸한 면을 닮기도 했지만, 학생들이 학교에서부터 냉혹한 계급화를 경험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 속 학생들은 이미 계층과 계층간의 차이를 체감하고, 그 차이에 복종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대다수의 학생들이 선도부와 일반 학생들 간의, 공부 잘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 간의 그리고 싸움을 잘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 간의 계급 차이를 인지하며, 그것을 고려하여 행동하였기 때문이다. 선도부란 본래, 자신들의 행동이 다른 학생들의 모범이 되고, 규칙에 맞지 않는 불량 학생들을 지도해주는 역할을 해야 하지만, 선생님이라는 힘을 뒤에 업고, 그것을 권력으로 이용해 다른 학생들을 오히려 괴롭히고 있었다. 성적도 별로이고, 가진 것이 없는 학생들은 인간 대접도 못 받고 있는 것이었다. 학창 시절,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 학생들은 어떠한 잠재적 교육과정을 습득했으며, 과연 그것이 사회에 나아가서는 어떠한 작용을 하게 될까? 조심스럽게 추측을 해보자면, 지속적인 복종에 익숙해져, 자신감과 의욕이 결여된 삶을 살 수 있다. 소중한 학생, 한 명 한 명의 인생이 폭력과 복종이라는 잠재적 교육과정에 세뇌되어 희생당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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