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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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읽고
이 책을 통하여 예전에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닐 때, 국사책에 등장하던 송시열이란 인물을 당시의 시대 상황과 함께 새로운 측면을 비롯하여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가 일생을 살았던 시대는 인조반정문제나 인조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아 북벌을 외치던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 이를 둘러싼 예송논쟁을 비롯하여 조선조 최고 당쟁의 시기라 볼 수 있다. 이러한 당쟁의 시기의 중심에 송시열이 있었고, 송시열은 조선시대 최대의 당쟁가로 서슴없이 온몸을 당쟁에 내던졌다. 논란의 양극단에는 항상 다른 당파들이 있었고, 각 당파들은 서로를 증오하고 저주했고 이런 증오와 저주의 결과로 결국 송시열은 83세에 ‘죄인들의 수괴’라는 애매한 죄목으로 사약을 마시고 사사를 당하고 만다.
이러한 내용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서인들의 오로지 권력을 장악할 야심으로 광해군과 북인 정권을 끌어내리려는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신하에 의해서 한 나라의 임금이 바뀌고, 또한 그들은 명나라를 향한 의리란 뜻의 항명대의 또는 명나라를 숭상하는 의리란 뜻의 숭명의리를 드높였다. 이러한 친명배청의 정책의 결과 삼전도의 치욕을 낳은 꼴이 되었고, 이후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 문제와 시간이 흘러 귀국 후의 소현세자와 세자비를 비롯한 자식들의 비운의 죽음이 이어졌고, 인조를 이어 효종이 왕에 즉위되면서 효종의 스승이었던 송시열은 드디어 출사길에 올랐다. 송시열을 조선 역사상 최대의 당쟁가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가 조정에서 벼슬한 기간은 불과 몇 년에 지나지 않았고, 그가 조정에 출사해 정승의 임무를 수행한 날은 49일에 불과했다. 나머지 기간은 고향에서 학문을 닦고 문인들을 길렀으며 배후에서 집권당인 서인과 노론을 조종했던 것이다. 병자호란으로 결정적 타격을 입은 인조, 그리고 둘째 아들로서 소현세자의 장남 석철의 자리를 차지한 효종으로서는 산림의 지지 여부가 왕권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지주가 되므로, 송시열에게 자주 벼슬을 제수한 것이다. 송시열이라 함은 국사책에서 효종과 함께 북벌을 함께 외치던 인물로 배운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으나, 송시열의 북벌론은 실제 무력으로 청나라를 정벌하는 무력 북벌론이 아니라 명나라의 은혜를 잊지 말고 우리의 힘을 길러 청나라와 국교를 단절하자는 명분적인 북벌론이자 제한적 북벌론에 그친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는 현실을 뒤바꾸지는 못할지라도, 자신의 정체성만을 끝내 지키자는 자기 정체성론이었던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하지만 효종은 명분론자가 아닌 현실론자로 송시열처럼 국력을 길러 청과 국교를 끊고 이미 망해버린 명을 섬기는 따위의 명분적인 북벌론은 아무 의미가 없었고, 군사력으로 청나라를 정벌하자는 글자 그대로 북벌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북벌론을 수행하는 데에는 문신들의 반발이 거세었고, 송시열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효종이 치안을 중시한 데 비해, 송시열과 송준길은 시급한 것은 치안이 아니라 군주가 몸을 닦는 수신이라 하였으며, 효종이 군비확장을 주장한 데 비해, 그들은 민심이 먼저라고 주장했다. 즉 효종의 일차적 관심이 군사적 북벌에 있었다면 송시열의 일차적 관심은 다른 데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주자가 주인이 되는 주자의 나라를 만드는 데 있었던 것이다. 한 나라의 대신이 나라와 백성을 위한 현실적인 문제는 뒷전이고, 학문적인 명분만을 쫓는 이상만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란 와중에 효종이 의문의 급서를 당했고, 효종의 시신을 둘러싼 관 문제나 묘자리 문제 등의 소동이 일어났으며, 또한 효종의 법적인 어머니 자의대비 조씨가 아들의 국상 때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제1차 예송논쟁이 일어났다. 예송논쟁을 간단하게 말하면 효종이 승하했을 때 모후 자의대비가 장자의 예를 따라 3년복을 입어야 하는지 아니면 차자의 예를 따라 1년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이었으며, 예송논쟁은 단순하게 생각하면 전례 문제에 지나지 않지만, 내부적으로는 변칙적으로 왕위를 계승한 효종의 종통이 정당한가하는 문제이자, 당시 신분제 사회가 붕괴하기 시작하면서 현안으로 등장한 서얼허통 문제나 노비종모법 문제 등 여러 가지 사회 개혁 현안에 하나의 이정표가 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또 당시에 이러한 예론이 정권을 좌우할 만큼 중요하게 대두한 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는데, 하나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신분제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에 위기감을 느낀 사대부들이 수구적인 예론으로 지배질서를 계속 유지하는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억울하게 비명에 간 소현세자를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그 근저에는 왕가의 왕통은 일반 사대부가의 종통과 다른 차원의 질서인가 아니면 같은 성격의 질서인가 하는 서인과 남인의 시각차가 있었는데, 바로 이 점이 예송을 정권 차원의 논쟁으로 격상시킨 주된 요인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후 예송논쟁은 격렬하게 진행 되었는데, 인조반정 이후 야당으로 출발한 남인들은 예송논쟁을 이용하여 야당의 지위에서 벗어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국왕을 자당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3년설을 주장하였고, 반면 서인들은 왕권과 신권의 차별보다는 치자 계급인 사대부의 보편성을 중시한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이후에 현종의 어머니인 인선왕후 장씨가 세상을 떠나면서 제2차 예송논쟁을 불러 일으켰는데, 제2차 예송논쟁은 효종비 인선왕후가 승하했을 때 역시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자의대비가 장자부의 예에 따라 1년복을 입어야 하는지 차자부의 예에 따라 9개월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이었다. 이에 서인들은 9개월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인조가 효종을 선택해 적통을 물려준 것은 천하의 법칙에 어긋나는 것으로서, 효종이나 인선왕후는 장자. 장부의 복을 입을 수 없으니 자의대비의 복제는 9개월복이 맞다고 주장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현종의 왕통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현종이 서인들이 의정한 대공복을 기년복으로 바꾸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집권당 서인에게는 국왕의 명령보다 당론이 더 중요했다. 나라의 권력이 신하에게 있고 임금에게는 있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이리하여 현종은 서인들이 차지하고 있는 정권을 갈아치우기 위해 집권당을 교체하려는 승부수를 던지고 남인 세력을 정권에 등용하기 시작했으나, 이러한 정권교체 와중에 34세의 젊은 나이에 끝내 세상을 뜨고야 마는 이변이 일어났다.
현종의 뒤를 이은 숙종은 어린 나이로 예송논쟁의 마무리를 해야 하는 큰 과제를 떠안게 되었고, 이는 체이부정의 당사자인 송시열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판가름 나는 문제라 할 수 있었다. 숙종은 제1차 예송논쟁 당시 송시열의 기년복설을 공박하다 좌천된 허목을 대사헌에 발탁해 서인들을 충격에 빠뜨렸고, 예송논쟁의 또 한 당사자인 윤휴를 사헌부 장령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송시열과 예론을 벌이다가 죄를 입은 인물들을 모두 신원하였다. 이에 서인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고, 숙종이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에게 강경한 자세를 취하자 현종의 급서로 낙담했던 남인들은 기뻐했다. 이후 남인들은 송시열을 체이부정 문제를 끌어들여 탄핵하고 나섰으며, 결국 송시열은 함경도 덕원으로 유배되었다. 드디어 남인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나선 것이었다. 송시열은 유배지를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고, 남인들의 권력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하지만 허적의 연시연에 허견이 무사들을 모아 정변을 일으킬 거라는 소문과 이런 남인정권에 위협을 느낀 숙종은 국사의 파트너를 서인으로 바꾸는 경신환국을 단행했고, 6년여 만에 남인들의 세상이 가고 서인들의 세상이 다시 돌아왔다. 이는 송시열의 세상이 다시 온 것이기도 했다. 서인들에 의한 남인들을 처단하는 복수가 이루어 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역시나 남인 세력을 없애기 위한 공작정치에 의한 조작이 일어났고, 그에 대한 처벌을 둘러싸고 젊은 사류들과 서인 정권의 실세들 간에 논란이 일어났다. 이는 훗날 서인을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게 하는 한 계기가 되는 일이었다. 당론과 정권에 얽매여서 자신들을 지켜내기에 급급한 사대부들은 왕권과 연관되어 권력 지키기에 여념이 없었고, 이는 조선 왕실의 끊임없는 분쟁과 많은 이들의 죽음을 가져오는 비극을 이어나가는 원인이었다.
숙종에게는 자식이 없다는 큰 문제점이 있었는데, 그는 김만기의 딸인 인경왕후와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 두 왕비를 두었지만 인경왕후는 경신환국이 이루어지던 숙종 6년에 천연두로 사망하고, 그녀가 낳은 세 딸도 모두 일찍 죽고 말았다. 다음해에 숙종은 15세의 인현왕후를 맞이했으나 20세가 다 되도록 왕자는 물론 공주도 낳지 못하고 있었다. 이즘은 숙종은 장희빈이라고 불리는 장옥정이란 궁녀 출신의 여인을 만나게 되지만, 그녀는 천인 신분에 불과했고 집안이 남인가와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서인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하지만 이러한 긴장 상태 속에서 왕자가 탄생하였고, 천지에 핏줄이라고는 없었던 숙종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으나, 서인들은 어린 왕자에 대해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숙종은 왕자와 장씨의 지위를 튼튼히 해놓지 않으면 장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자신할 수 없는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왕자가 태어 난지 3개월이 채 안되어 왕자의 명호를 정하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왕자의 명호를 짓는 것은 단순한 명호가 아니라 원자의 명호를 짓겠다는 뜻이기 때문에, 원자의 다음 수순은 세자이므로 원자 정호 문제는 왕위계승과 관련 있는 일이었다. 따라서 비록 정비가 아닌 후궁의 소생이라 하더라도 원자로서 정호 되면 자연히 다음 세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는 서인 정권에게는 목숨을 걸고 막아야 할 일이었고, 실제로 송시열과 서인들은 여기에 정권의 운명을 걸었다. 하지만 숙종의 생각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고, 그는 서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호 문제를 거론한지 5일 후에 장씨가 낳은 아들을 원자로 봉하고 종묘사직에 고했다. 또한 귀인 장씨를 내명부 정1품 희빈으로 책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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